지난해, 10월 23일(금) 근무를 끝내고 친구 가족들과 경주행!!
장흥을 출발해서 순천, 순천에서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바람처럼 달린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제법 들뜬 모습.
렌트한 봉고차에 사람이 그득하다. 빈 자리는 없다, 조금 좁지만 나는 운전병이라 공간을 넉넉하게 확보!!
세 가족 열 두 명이 오후 6시쯤 출발하여 밤 12시쯤 경주에 도착!!
원래 계획은 비용을 아끼고자 찜질방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는데 찜질방에서 간식 먹고, 어쩌고하면 절약도 안될 것 같고, 몸만 피곤할 것 같아, 여관방에 묵기로 결정.
여섯 시간 동안을 참새처럼 재잘거리던 아이들이 잠에 떨어지고, 우리 어른들은 경주에서의 첫 날 밤을 그냥 보내기가 아쉬워 밤 12시 30분에 로비에 집결!
한가한 곳에 위치한 여관이라서, 소주 한 잔 마실 곳이 없어 택시기사에 취지를 설명했더니 동대앞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으로 데려다 준다.
제법 시간이 늦었는데 젊은이들로 가득하다. 불빛도 밝다.
조개구이 집에 앉았다. 우선 밑반찬으로 소주 한 잔씩을 입에 털어 넣었다. 달디 달다.
피곤을 잊게 만든다.
어른 손바닥 크기의 키조개 껍질에 조개살 몇 개 올려 연탄불에 구워먹는다. 근데 그것이 전부란다.
키조개 껍질 6개에 올려진 조개 몇 개가..... 헛참! 우리 고향에서는 밑반찬도 그 정도는 더 주는 데.....
어쩌겠나? 로마에 가면 로마법에 따라야지.
모두들 아쉬운 눈치다. 위장에 들어간 소주 몇 잔이 술을 더 부른다.
조개구이집에서 나와 모퉁이 하나 돌아가니 거기에 별천지가 펼쳐져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들어가 앉는다.
이곳은 가격도 저렴하고 안주도 푸지다. 한치와 돼지고기 볶음 안주에 너무나 비싸고 먹을 것 없었던 조개구이 집까지 안주 삼으니 안주가 한참이나 남는다. 살림하는 주부들이라 한치를 위생봉지에 담아 나온다. 택시를 타고 여관으로....
새벽, 일어나 씻고 여관 옆의 식당에서 된장찌개, 김치찌개로 아침을 먹는다.
된장찌개가 엄청 짜다. 물을 부어도 짜다.
식당 아줌마는, 우리가 엄청 싱겁게 먹는갑다고 말한다. 자신의 요리솜씨를 과신하는 모습이다. 모두가 찌개를 멀리한다.
신라의 고장 경주에 왔으니 신라의 문화를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아이들 교육적인 차원에서 제일 먼저 국립 경주박물관으로 고~고씽
정문을 들어서니 국사책에서만 보았던 에밀레 종의 장엄한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원래 이름은 성덕여왕신종이라지. 1962년에 국보 29호로 지정되었고,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종으로는 가장 크고 무게만도 25톤에 이른다니 입이 벌어진다. 지금처럼 중장비도, 기계도 변변찮은 시대에 이토록 위풍당당한 종을 주조했다는 것이 놀랍고 놀랍다. 경외롭다.
종을 주조할 때 살아있는 아이를 바쳤다는 전설. 물론, 종의 성분을 분석한 결과는 아이를 봉양하지 않았다고 밝혀졌다지만 참으로 웅장하다. 그만큼 신성한 마음으로 주조했음을 역설적으로 설멸하는 것이 아닐까? 박물관 경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녹음된 에밀레 종소리가 은은하게 퍼져나온다.
거북 모양의 술잔이다, 실용적이지 못한 모양새다. 아마 위용을 나타내는 술잔이 아닐런지... 여하튼 놀랍다. 사람의 눈은 비슷해서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적 심미안은 비슷했나보다. 균형과 불균형의 사이, 그리고 세련과 투박함에서의 조화 속에 더욱 깊은 아름다움이 있으니.......
금관이다. 옥으로 장식한 금관. 문득 왕이라는 절대권력의 이면에는 참으로 큰 고통이 따랐겠다는 생각에 미친다. 순금으로 왕관을 만들어 머리에 썼으니 얼마나 무거웠을꼬... 목 디스크는 걸리지 않았을까? 어쩌면 허리까지 휘어지지 않았는지 몰라....
빛에 빛나는 왕관, 그 왕관의 위용. 비록 외세의 힘을 빌렸다지만 삼국을 통일한, 신라 1000년의 역사가 금관과 함께했으리......
박물관 뒷편에 세워진 모조 다보탑. 진짜 다보탑은 불국사에 있지만 하필 보수공사 중이라서 볼 수가 없단다. 아쉽다. 개인적으로는 석가탑보다 다보탑을 좋아하는 데... 10여 년 전에 불국사를 찾았을 때는 다보탑을 볼 수 있었는 데....
다보탑, 친근하다. 어쩌면 10원 주화에 새겨진 도안때문인지 모른다.
박물관 길 건너에 위치한 분황사로 발길을 돌렸다.
서기 634년(선덕여왕)에 창건되었단다. 국보 제 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을 비롯한 문화재가 우리 일행을 반긴다. 30만 6,700근의 구리로 만들었다는 약사여래동상은 안타깝게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러나 솔거가 그렸다는 관음보살상은 신화(神畵)로 일컬어진단다. 또한 천수대비 벽화는 매우 영험하여 눈 먼 아이가 노래를 지어 빌었더니 눈을 뜨게 되었단다.
분황사 단풍과 이별하고, 통일신라 문무왕(674년)이 만들었다는 안압지.
연못을 만들고, 진귀한 화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아마, 그 연못가에서 한 잔의 술도 함께했겠지. 풍류를 아는 자가 학문도 익히고 무예도 익히는 법. 풍류 속에서 나라를 걱정했으리.
우리 일행은 첨성대로 향했다. 첨성대 가는 길 건너편에 왕릉이 보인다. 누구의 왕릉인지 궁금했으나 다음으로 미루고 발걸음 재촉한다. 벌써 점심시간이 훨씬 지났다.
국보 제 31호인 첨성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옛사람들에게는 자연은 경외 대상이었고,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그뿐인가, 자연현상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기도, 상실하기도 했으니 얼마나 자연은 인간에게 위대한가.
태양, 달과 별, 구름, 하다못해 바위, 바다의 파도조차 기원의 대상이었으니.
뿐이랴, 자연을 관찰하는 것은 농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농사는 곧 백성이 굶주리지 않음을 의미하지만, 한편으로는 전쟁에서의 군량미와도 직결됨이라.
해서, 별을 관찰한다는 것은 단순한 천문학에 그치지 않았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첨성대는 천문대가 아니라 주술적 의미, 신에게 제사를 올렸던 장소라는 주장이다. 내 개인적인 생각에도 기원의 장소가 훨씬 설득력이 있다는 생각이다. 천문대라면 하늘을 살필 수 있는, 즉 첨성대에 올라갈 사다리를 걸었던 흔적, 혹은 별자리를 그려 넣을 최소한의 책걸상의 흔적이라도 존재해야 할 것 같다. 또한 천문대라면 별자리를 관찰하고 쉴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제단의 특성은 땅보다 높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고, 첨성대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메개체가 아닐런지. 땅은 곧 인간이 살아가는 공간. 하늘과 땅의 조화를 이루기 위한 신성한 장소였으리라 추론한다. 또한 첨성대와 가까운 곳에 왕릉을 만들었다는 것은 이곳이 제사의 장소였고, 신성한 곳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런지...
좀 늦은 점심을 먹는다. 마침 중화요리 집에 눈에 띄어 들어가 앉는다. 일행이 12명이어서 주문도 다양하다.
자장면, 돈가스, 국밥, 짬뽕.... 무조건 맛있다. 역시 시장이 반찬이다.
포석정으로 향한다. 경주 남산 서쪽 기슭에 위치해 있는 포석정을 찾아가면서 헛갈렸다. 옆에 앉아 길라잡이하던 친구가 표지판을 잘못 본 것이다. 한참을 돌아 포석정에 도착했다.
그때가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7차전, 마지막 경기가 진행되던 시간이어서, 우리는 매표소에서 점수를 묻는다. 한국시리즈 우승이라는 타이틀을 놓고 두 팀간의 치열한 경기가 한창....... 와이번즈가 점수를 많이 얻어 기아타이거즈의 패배가 짙다.
포석정은, 신라 왕들이 전복 모양의 수로(水路)에 술을 흘려보내고,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놀았던 연회의 장소였다고 한다. 특히, 신라말엽에는 사치생활이 극에 달해, 국가의 정치도 군사도 외면했다고 전해지고, 외세의 침입 위협 속에서도 풍류만을 즐겼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것은 신라를 무너뜨린 고려의 입장에서, 신라왕권을 무너뜨린 정당성을 만들기 위한, 이토록 부패한 왕조를 멸망시켜 도탄에 빠진 신라의 백성을 구하기 위한 의로운 군사행동이었다고 강변하기 위한, 전쟁에서 승리한 고려의 입장에서 기술한 역사라는 주장에 무게가 실린다.
백척간두의 나라의 상황에서 어느 왕이 술에 빠져 있었겠는가?
나라가 평온할 때는 풍류의 장소였을지언정, 위기의 나라의 상황에서는 포석정은 절대의 힘, 보이지 않는 신(神)의 힘을 빌어 나라의 위기를 구하고자 제사를 지냈던 장소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릴 필요가 있음이다.
일찌기 경주 남산은 신성한 산이었다.
예를 들어, 삼국을 통일한 김유신이 유년기에 무예 연마를 게을리하고, 술과 기생에게 빠져있을 때, 경주 남산에 살았던 천관녀(神女)가 홀연히 나타났고, 그 천관녀에게 깨우침을 얻어 술집으로 향하던 자신의 말을 단칼에 베어 죽이고..... 유명한 일화가 아닌가?
남산은, 포석정은 누룩냄새에 찌든 향락의 장소가 아니라, 어두운 현실에서 절대적인 힘을 얻어 나라를 구하고자 기도를 올리고, 제사를 지냈던 신성의 장소가 아닐런지......
불국사로 향한다.
관리사무소에서 프로야구 점수를 묻는다. 내가 응원하는 기아타이거즈가 점수 차이를 좁혔다. 그래도 역전하기는 힘든 점수다.
토함산에 위치한 불국사는 1995년에 세계문화유사에 등재되었다.
불국사 창건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서기 528년(법흥왕15) 법흥왕의 어머니 영제부인이 창건하였다는 설(說)과, 이보다 연대가 앞선 눌지왕(訥祗王) 때 아도화상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는 데, 경덕왕 때의 재상 김대성에 의하여 대대적으로 확장된 것이 확실하다.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현세(現世)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창건하였다고 하였으며, 김대성이 이 공사를 착공하여 완공을 하지 못하고 사망하자 국가에 의하여 완성을 보았으니 30여 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러나, 글씨도 일정하지 않고 크기도 달라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추측되므로 여기에 나열된 건물들이 당시 한꺼번에 창건된 것이 아니라 임진왜란 때까지 조금씩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단다.
1593년 5월 임진왜란 때 2,000여 칸의 대가람이 불에 타버리자 1604년(선조 37)경부터 복구와 중건이 시작되어 1805년(순조 5)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국가적으로 또는 승려들에 의하여 부분적인 중수(重修)가 이루어졌으며 1805년 비로전 중수를 끝으로 그 이상의 기록은 없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대규모의 개수공사를 실시하여 다보탑의 해체와 보수, 법당의 중수 등을 실시하였는데 이때 다보탑 속에 있던 사리장치(舍利藏置)가 행방불명되었고 공사에 대한 기록도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8 ·15광복 후인 1966년 석가탑의 해체복원 등 부분적 보수가 있었다가 1969년 불국사 복원위원회가 구성되고 1970년 2월 공사에 착수, 1973년 6월 대역사(大役事)를 끝마쳤다고 한다. 이 공사로 유지(遣址)만 남아 있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을 복원하였고, 대웅전,극락전, 범영루, 자하문 등도 새롭게 단장하였다고 한다.
다보탑은 해체하여 수리하는 중이어서 석가탑만 무연히 바라본다. 어디선가 바위를 쪼는 망치소리 들려오는 듯하다. 석가탑 꼭대기 보주에 넘어가는 태양이 걸렸다.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의 힘으로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원동력, 그것은 내 가족의 행복과 나라의 평화를 기원하는 원초의 정신!
배를 굶으며, 잠을 참으며 ,힘겨운 노동조차 기쁨으로 알고 하나의 바위를 깎고, 나무를 깎아 만든 사찰. 그 사찰은 단순한 종교의 기도처가 아니라, 신라인의 정신과 혼이 깃들어 있는 신라의 전부가 아니겠는가?
전설에 의하면, 불국사의 다보탑을 완성하고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실명을 만들었다는 데 눈을 찌른 그 마음, 그 속뜻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벌써 어둠이 찾아온다.
마트에 들려 온갖 먹거리를 산다. 푸짐하다.
팬션에 들어와 쌀을 씻고, 국을 끓이고 고기를 굽고, 과일을 씻어 물기를 빼고.... 분주하다. 아이들도 하루의 피곤을 씻는다. 배가 고프다고 아우성이다. 맛있는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어라, 기아타이거즈가 동점을 만들었다. 그리고 9회말 극적인 역전 홈런이 나온다. 잠실구장은 흥분의 도가니, 함성의 도가니다. 5:1에서 5:6으로 역전 우승을 일궈낸 기아타이거즈! 팬션에 함성이 울려퍼진다.
팬션 베란다에 불판이 있다. 사용료가 만 원이란다. 기분이 언잖지만 돈을 지불하고 고기를 굽는다. 소주 한 잔도 곁들인다.
푸짐한 저녁만찬이었지만 식당에서 먹는 비용과 맞먹는다.
새벽, 일어나 어둠을 뚫고 석굴암으로 향한다. 친구가 모처럼 운전대를 잡았다. 길이 양(羊) 창자처럼 구불구불하다. 어찌나 굽어있고 경사가 가파른지 도통 어려운 길이 아니다. 차도 힘이 든지 엔진소리가 크다. 그래도 저 아래 경주시내의 야경이 멋지다. 이윽고 주차장에 도착했다. 벌써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린다. 토함산 일출을 맞으려는 관광객인 듯 싶다.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앞장 서 산을 오른다. 제법 가파르다. 한참을 올라가도 석굴암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상하다. 10여 년 전에 석굴암에 왔을 때는 이렇게 가파르지 않았는 데... 분명 산책로처럼 평지였는데....
앞서 간 친구에게 전화해서 내려오라 전하고 하산. 매표를 하고 들어선다. 어렴풋 낯익은 길. 10여 분 걸으니, 석굴암이 나타난다.
이미 일출은 진행 중이다.
구름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을 향해 합장하는 사람, 사진을 찍는 사람, 함성을 지르는 사람... 각양각색이다.
석굴암에 모셔진 부처님의 정수리에 박힌 보석이 정확하게 떠오르는 태양과 일치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바위의 굴을 이용하여 석굴암을, 부처님의 자비가 온누리에 퍼지기를 기원하며 돌을 다듬었을 신라의 장인들을 생각한다. 그들도 지금의 우리처럼 떠오르는 장엄한 태양 앞에서 겸허한 마음이었으리라.
가을 새벽의 공기가 신선하다. 산과 어울어진 석굴암. 자연과 인공의 알맞은 조화. 화려하지 않으나 빛나는 석굴암! 참으로 소박한 석굴암이지만 그 소박함 속에는 신라의 정신이 살아있고 혼이 담겨있다. 나를 버려서 얻는 것, 나를 희생하여 얻고자 했던 것은 진리였을까? 깨우침이었을까? 혹은 부모와 형제와 나라의 화평이었을까? 그 무엇을 갈구하며 토함산 기슭에서 부처님을 친견했을까? 불가사의다.
석굴암에서 나오니 이제야 토함산 단풍이 눈에 들어온다. 걷는 길 주변에 다람쥐 한 마리 지나간다. 가을이니 바쁘겠지. 아이들이 쫒아간다. 다람쥐는 꼬리를 흔들며 사라진다. 이쉬운 탄성 소리 들려온다.
팬션으로 돌아오는 길, 구멍가게에서 라면을 구입했다. 역시 맛있다. 새벽부터 움직였으니 당연히 시장하다. 전날 밤에 마신 술 때문이지 라면국물이 끝내준다.
짐을 싸고 팬션주인에게 인사하고 포항으로 향한다.
상생의 손이 세워진 포항의 구룡포 호미곶로 향한다. 포항제철을 지난다.
고속도로를 벗어나니 국도가 구불구불하다. 바다가 보이기 시작한다, 우리 고장, 남해안의 바다와는 사뭇 다르다. 개펄때문에 늘 회백색인 바다, 그 남해바다가 아닌 동해는 푸르다 못해 눈이 시리다. 경치 좋은 곳에는 어김없이 모텔들이 자리를 잡았다. 한반도 지형에서 호랑이 꼬리를 닮았다는 호미곶에 도착하니 이곳을 대표하는 과메기 모형판이 정겹다.
역시 10여 전에 다녀갔던 곳, 낯익다. 내가 묵었던 여관도 지난다. 정겹다.
바다에 위치한 상생의 손, 오른손이다. 갈매기도 함께 한다. 가을 바다를 날으는 갈매기가 한가롭게 느껴진다.
땅에는 왼손이다. 서로 마주하고 있는 손. 손은 맞잡아야 한다. 손은 부딪쳐야 소리가 난다. 이것은 그리움이 아니다. 함께하는 상생이고 어울림이고 조화이고 화합이다.
손 앞에는 꺼지지 않는 불이 타오르고 있다.
새 천년을 맞이하는 1999년 12월 31일, 마지막 날에 전라북도 부안군 변산반도에서 채집한 불씨와 2000년 1월 1일, 첫 날 이곳 호미곶에서 채집한 불과 남태평양 피지에서 채집한 불이 합해져 타오르고 있다.
상생의 손 조각 뒷편에 연오랑세오녀 상(像)이 세워져 있다. 두 사람의 애틋한 사랑을 대변하 듯 서로 마주 본 자세다.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는 신라의 동해 바닷가에 살고 있던 부부인데, 미역을 따러 나간 연오랑이 올라섰던 바위(물고기라고도 한다)가 움직여 일본의 한 섬에 닿아 임금이 되었다.
남편을 찾아 나선 세오녀도 바위에 실려 일본에 닿아 연오랑을 만나고 왕비가 되었다. 그 때 신라에서는 돌연히 해와 달이 빛을 잃게 되었다. 변괴에 놀란 왕이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이는 해와 달의 정기가 신라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탓이라고 아뢰었다. 왕이 급히 사신을 보내어 두 사람을 찾으니, 연오랑은 하늘의 뜻이라 돌아갈 수는 없으나 세오녀가 짠 세초(細綃:생사로 가늘게 짠 비단)를 가지고 돌아가 하늘에 제사지내라 하였다. 그대로 하였더니 다시 해와 달이 밝아졌다. 이로부터 제사 지낸 곳을 영일현(지금의 영일만)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설화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태양은 주술의 대상이며, 경외의 대상이다. 통치의 수단이었고, 통치를 잃게하는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태양은 왕에게나, 백성에게나 절대적인 신물(神物)이었다.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는 태양신에 관한 설화로서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해맞이광장을 벗어나, 해변길로 돌아서니 싱싱한 해산물을 안주인 포장마차들이 즐비하다. 술 좋아하는 친구들이 입맛을 다신다. 의자에 앉는다. 나는 운전병이라 참는다. 미안해하는 친구들에게 술을 권하고, 아이들에게는 간식으로 핫도그를 사준다.
인근에 국립등대박물관이 자리하고 있지만 아쉬움 속에서 집으로 향한다.
포항, 경주, 양산, 부산 근처를 지나 호남고속도로. 마산을 지나고 이윽고 섬진강휴게소다. 다리를 건너면 전남 땅이다. 순천을 지나고 보성을 지나고 이윽고 장흥이다. 내 고향이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이다.
함께 저녁을 먹는다. 이제 나도 술 마시는 일에 동참한다. 참 멀고도 먼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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