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라

개팔자, 상팔자라구요?

然山 2008. 5. 14. 16:39

(단편소설)

 

개팔자, 상팔자라구요?

 

 

나, 혜지는 지금 너무 우울하고 슬프다.
슬픔에 젖은 이유가 욱신거리는 삭신 때문만은 아니다. 이까짓 고통이야 어금니를 깨물면 그만이지만 이미 오래 전부터 오늘을 예감하고 서로를 견제하며 조심스럽게 딛어 온 발걸음이었다. 결국 타들어 온 도화선이 뇌관을 건드려버린 지금, 차라리 나의 잘못으로 뇌관이 터졌다면 억울함은 더 작을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아직도 곳곳에 터지지 않은 폭탄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더 두렵다.
곱게 치장하고 외출을 나섰다가 뜬금없이 만난 소나기 같은 슬픔이, 잠깐의 소나기라면 잠시 쉬어 가면 그만이고 기다리면 다시 햇살이 창창해질 터이지만 먹장구름이 가득한 지금의 기분이 언제쯤 맑은 하늘로 바뀔지 좀체 짐작할 수 없다. 맑은 날과 흐린 날의 되풀이가 세상살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이미 장마로 접어든 슬픔의 원인과 시작을 너무나 잘 알고 있어도 그것의 실마리를 풀어갈 방법을 전혀 모른다.
나는 지금 우리 나라에서 생산되는 최고급 승용차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병원을 향하고 있지만 석삼년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은 심정이다. 평소의 외출 같으면 농악판의 상쇠처럼 흥겹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운전대를 잡은 박여사가 짬짬이 보내는 눈길조차 서글픔으로 다가온다.
오늘도 변함없이 깨끗하고 푹신한 융단이 깔린 나의 왕궁에서 아침을 맞았다.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고 뽀글뽀글 끓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었다. 무거운 추를 매달아 놓은 듯한 눈꺼풀에 남아있는 겉잠을 떨치고 눈을 떴다. 그 순간 안방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흠칫 놀라며 오늘도 한바탕의 전쟁이 진행중인 것을 직감했다.
내 슬픔의 뿌리와 시작은 순전히 대한민국의 정치상황 때문이다. 정치가 안정되고 국민이 편안하다면 지금의 슬픔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정치와는 무관했던 삶이 어느 날 갑자기 세심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텔레비전의 뉴스시간이면 제법 귀를 쫑긋 세워 들어야만 한다. 지나간 공화국이 그립다고 말하는 정치인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들이야 정치적 영화(榮華)가 그리운 것이지만 나는 아예 정치와 담을 쌓고 살아도 좋았던 평범했던 시절이 그리운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평범한 일상은 사라지고 귓속을 파고드는 세상의 온갖 소리, 목소리들 때문에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다.
사방이 시끄러우면 아무리 커다란 목소리도 한낱 소리들의 웅성거림에 불과하지만 아무리 작은 소곤거림도 한결같은 목소리라면 그것은 어떤 외침보다 또렷하게 들리는 법이다.
언제부터인가 박제가 되어버린 정치와 경제를 되살려 힘찬 피돌기를 시키려 응급처치를 시행하고 있는 중이다. 그 첫 번째 처방이 바로 내각(內閣)의 개편으로 가닥이 잡혀가고 있다. 능력이 부족하고 개혁성향이 부족한 몇 개 부처의 장관을 경질할 것이라는 풍문이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약 보름쯤 전이었다. 그것도 정치권이 아닌 언론에서 먼저 흘러나왔다.
어떤 사안이든 기자(記者)들의 후각은 아주 예민하다. 기자들은 먼저 냄새를 맡아보고 주변을 살피다가 반응이 없으면 마음껏 포식한다. 포식이 채 끝나기 이전에 세상은 바뀐다. 바뀐 얼굴을 놓고 한동안 맛있는 요리를 즐기다가 이빨이 아프면 씹기를 그만둔다. 그쯤이면 기자들만 이빨이 아픈 것은 아니다. 세상의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바쁘게 돌아가고 어떤 일이든 그것이 자신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 나, 내일 일본으로 떠나니까 그렇게 아세요"
" 안 된다고 했잖아. 혜지가 그렇게 중요해 ?"
" 내일 열 한시 비행기니까 그렇게 알아요."
" 누구 죽는 꼴 보려고 그래!"
박여사는 어젯밤 귀가하여 들어온 현직 국회의원인 남편이 손발을 씻기도 전에 기어코 일본을 가겠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했다.
처음으로 박여사가 일본을 다녀오겠다는 말을 꺼냈을 때는 아직 언론도, 정치권도 잠잠한 시기여서 마동국 의원은 아주 쉽게 허락을 했었다. 이곳 저곳의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호들갑스런 자랑을 늘어 놓으며 꽃처럼 화사한 얼굴이 되었다.
그때 마침 내각의 개편이 불가피하다는 언론의 기사가 정치면을 도배하였고 마동국 의원의 하마평까지 나돌았던 것이다. 마의원은 모든 정보망을 동원하여 입각의 가능성을 저울질하기 시작하면서 아내에게도 일본행을 보류하라고 단단히 못박았다.
두 사람은 세상의 습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조만간 입각문제는 어떻게든 정리되어 세상은 다시 조용해 질 것을. 하지만 세상은 가마솥의 콩처럼 콩콩 튀기만 할 뿐 좀체 가닥이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박여사는 느긋하게 기다리지 못하고 날마다 일본행을 졸랐다.
" 이 한심한 여편네야, 제발 신문을 읽든지 뉴스를 들어봐, 지금의 내 입장과 상황이 어떤지를."
" 그것이 내가 일본엘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에요?"
" 정화수를 떠놓고 빌지는 못할망정 이 상황에서 일본을 가겠다고? "
두 사람은 새벽이 가깝도록 계속해서 싸웠고 나는 불안 속에서 밤을 보냈다. 늦잠을 즐기는 습관이 있는 박여사가 오늘은 일찍 일어나 아침을 먹고 있는 남편의 맞은편에 앉았다.
" 어떤 일이 있어도 오늘은 떠날 테니 그렇게 알아요."
박여사는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고 방으로 들어갔고 불끈한 마의원이 뒤쫓아 들어가 핸드백이며 장롱, 화장대를 들추어 보았지만 여권은 이미 어딘가에 숨겨버리고 보이지 않았다. 마의원이 절대로 안된다고 고함을 지르고 현관으로 향했다. 나는 화가 치민 의원님을 위로하고 배웅하려고 그에게 다가갔다.
"에잇!"
의원님은 구두를 신은 발로 나를 대뜸 걷어찼고 나는 비명과 함께 소파 위로 떨어지고 말았다. 의원님은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운전기사가 살짝 얼굴을 찌푸렸다. 내 비명소리를 들은 박여사가 황급히 뛰어나와 나를 감싸 안았다. 나는 발길에 채인 아픔보다 오늘의 슬픔을 안겨 준 세상을 탓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박여사는 김원장의 병원에 연락을 취하고 시집간 딸에게도 일본행을 취소하니 공항에 나오지 말라는 전화를 걸고는 서둘러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낯익은 김원장이 모든 준비를 갖춰놓고 자동차가 도착하자 문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 나는 그의 손으로 옮겨졌고 곧 뢴트겐 검사가 시작되었다. 이 검사는 엑스선 검사와 비슷한 데 뼈의 골절여부나 이물질을 삼켰을 때 사용한다. 결과를 기다리며 커피를 마시는 박여사가 근심스런 얼굴로 자꾸만 나를 바라보았다.
야당이었던 마동국 의원이 주동하여 몇 명의 의원과 함께 여당으로 소속을 옮기던 무렵부터 박여사와 동거생활이 시작되었으니 벌써 2년이 되어간다. 마의원은 같은 지역구 출신의 저명한 인사가 영입되자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고 다음 선거에서 공천을 받기가 수월치 않으리라는 판단에 미련없이 소속 정당을 바꾸어 버렸다. 마의원의 걱정이 여기에 있었다. 아마 자신의 입각이 구체화되면 야당은 소신이 없는 철새 정치인이라는 주장을 펼치며 무차별한 난도질과 공격을 퍼부을 것이다. 결론은 언론의 힘을 빌려 방패로 내세우기 위해서 촌지를 준비하여 날마다 정치담당 기자들과 식사와 술좌석을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다. 이러한 시기에 도움은 못될지언정 일본을 가겠다는 아내를 마의원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원래 내가 태어난 곳은 대정건설 사장의 집이었다. 박여사와 대정건설 정사장의 부인인 희경씨와는 대학 동창이다. 우정이 남달랐던 두 사람은 졸업을 하면서 결혼까지 비슷한 시기에 올렸다. 박여사는 중소기업을 경영하던 아버지가 선택한 지금의 남편을 맞선으로 만났다.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방송국기자로 근무한다는 남자에게서 꿈틀거리는 야망이 느껴졌다. 그러한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지금은 관직에서 은퇴했지만 장관직을 두 번이나 지낼 정도로 쟁쟁한 힘을 갖고 있던 마동국의 아버지는 적극적인 막후 교섭활동으로 서른 후반에 국회에 진출시켜 젊은 나이지만 벌써 4선 의원이다.
박여사는 남편에게 부탁하여 절친한 친구인 희경씨의 대정건설이 몇 건의 공사를 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나는 수주한 공사의 보답이 아닌 친구 사이를 강조하는 희경씨의 극성에 거처가 옮겨졌다.
그때가 마침 박여사는 딸이 결혼을 하고 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무렵이라 늘상 눈두덩이 젖어 살던 시기였다. 남편은 항상 너무나 바빴기에 처음부터 따뜻한 위로를 기대하지도 않았다. 남들이야 부러운 집안이었지만 국회로 진출하면서 서로는 따로 국밥과 같았다. 박여사는 딸이 대학을 졸업하자 자신이 그랬듯이 앞날이 유망한 검사에게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또한 늘 말썽만 일으키던 아들이 족집게 고액과외에도 불구하고 대학입시에 실패하자 곧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내 생각으로는 아들이 공부에는 취미가 조금도 없는 것 같다. 열흘이 멀다하고 걸려오는 전화는 그때마다 희한한 명목으로 돈을 송금하라는 얘기 뿐 이었다. 자식을 일찍 키워 품에서 떠나보낸 박여사는 외로웠다. 시아버지의 엄청난 힘도, 무남독녀로 장차 자신의 몫으로 돌아올 재력도 외로움을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취미활동을 시작했다.
처음엔 꽃꽂이 학원을 다녔는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두 달이 못되어 에어로빅 학원에 등록했다. 원체 운동신경이 둔하고 평소에 운동은 남의 일이라서 오히려 몸이 피곤할 뿐이었다. 사흘만에 그만두고 이번엔 골프를 시작하려던 순간에 집안의 일에는 전혀 관심 없던 남편이 어떻게 알았는지 다음 선거에 영향을 끼친다고 극구 반대하여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에 왠지 품위 있어 보이는 서예학원을 다니다가 외유를 떠나는 남편을 동행하느라고 자연스럽게 관두고 말았다. 여자는 죽는 순간까지 손에서 빗을 놓지 않는다고 아랫배에 기름이 차오르기 시작한 몸매의 관리를 위해서 수영장을 열심히 다녔다. 근 반년을 투자하여 제법 개구리헤엄은 익혔는데 또다시 남편이 제동을 걸었다.
" 그만둬. 강산지 뭔가 하는 젊은놈 앞에서 옷을 홀딱 벗고 즐거웠겠구먼. 내 위신을 생각하라구, 위신을."
" 지금 질투해요? 그냥 건전한 스포츠에요, 스포오츠."
" 자선봉사단체 같은 곳에 나가면 다음 선거를 위해서도 좋잖아."
결국 수영까지 그만두지 않으면 안되었다. 처음엔 반대하지 않았던 마동국 의원이나, 너무나 쉽게 수영을 포기해버린 박여사는 서로에게 숨기고 싶은 비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장님, 결과 나왔는데요."
키가 작달막한 간호사가 필름을 내밀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입가에 웃음을 잔뜩 물고 나갔다. 원장이 아크릴판 위에 그것을 붙이고 집게로 물렸다. 스위치를 올리자 형광등이 몇 번 껌벅이더니 불을 밝혔다. 자리로 돌아온 원장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박여사가 안도하는 표정으로 나를 자신의 가슴으로 감싸주었다.
" 혜지가 임신중이라 세포에 손상을 줄 수도 있는 뢴트겐 검사를 피하려 했습니다만, 발길에 채였다해서 ...... 아무런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 정말 다행이네요. 혹시 유산의 염려는 없는거죠?"
" 장담하기는 어렵지만 지금의 상태는 양호합니다."
하얀 봉투를 내밀었고 원장이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억지로 만들었다. 원장을 비롯하여 간호사들이 문 밖까지 배웅을 나왔다. 박여사가 노련한 솜씨로 승용차를 출발시켰다. 나의 시야에서 병원이 사라졌을 때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오른손으로 운전대와 휴대폰을 동시에 잡고 왼손으로 전화번호를 눌렀다. 한참의 발신음에도 상대가 대답이 없자 연락번호를 남기고 휴대폰을 접어 내가 앉아 있는 의자의 빈 공간에 놓으며 얼굴에 밭고랑을 만들었다. 그녀가 라디오의 버튼을 누르자 한창 유행하는 대중가요가 흘러 나왔다. 박여사가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머리까지 끄덕이기 시작했다. 신호등에 걸릴 때마다 나를 바라보며 눈을 찡긋거렸다.
나는 방금 전화를 걸었던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또렷하게 알고 있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나를 자신의 곁에서 멀리하는 법이 없지만 이 사람을 만날 때는 예외이다. 노래가 끝나고 사회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어제 여의도 한강 시민공원에서 열렸던 소년 소녀 가장 돕기 기금마련을 위한 마라톤 대회는 일만 이천여 명의 시민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습니다. 이 뜻깊은 대회에 참가한 시민들은 자발적인 모금활동을 전개했고, 각계 각층의 인사와 여러 단체에서 후원금을 기탁하여 약 사천만원의 기금이 모아졌다고 합니다. 더구나 이번 행사에서는 후견인 제도를 도입......'
박여사가 바람 빠진 축구공처럼 얼굴을 찌푸리며 카세트 테이프를 밀어 넣었고 베토벤의 운명교향곡이 승용차의 실내를 떠다니기 시작했다.
" 혜지이, 이렇게 행사를 한다고 우리 나라의 모든 소년 소녀 가장들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겠니? 영원히 불가능할거야. 어차피 한계가 있는거고, 오히려 불쌍한 애들에게 상처만 줄 뿐이야. 괜히 의타심만 심어주고, 자립할 의지를 꺾어버리는 일에 불과한거야."
그녀가 혜지이 하고 내 이름을 길게 발음할 때는 기분이 매우 좋은 상태다. 항상 감정의 변화가 술취한 고수의 북장단과 다름없기에, 발길에 채인 나의 걱정이 안심으로 바뀌고, 그 기분은 상대방의 전화를 기다리면서 절정으로 치솟은 것이다.
" 그러니까 결론은 그들의 운명대로 살아가게 그냥 내버려 두는 게 좋아. 어느 누구나 열심히 노력한다고 모두 그 목표를 모두 달성한다면 이 세상엔 농사꾼이 하나도 없을걸. 아마, 아프리카에서 농사꾼을 수입해야 할거라구. 상류층은 상류층답게, 하류는 하류답게 살아가면 그만이야. 뱁새처럼 가랑이 찢어지지 않도록 말이야 그것이 세상의 이치지. 안그러니? 혜지이!"
나는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강을 따라 유람선이 생크림 같은 거품을 만들며 지나가고 있었다. 달뜬 기분에 젖은 얘기는 상대방의 전화가 걸려오기 전까지는 계속 이어질듯 했다.
" 혜지이, 운명교향곡을 갖고 생각해볼까? 베토벤은 귀머거리였잖니. 온전한 사람도 만들지 못한 훌륭한 음악을 만들었지만 귀머거리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어. 설령 피나는 노력의 결과로 상류층으로 진입해도 그 태생이 천한 것까지 지워지는 것은 아니잖아. 베토벤이 결국 귀머거리로 세상을 떠난 것처럼."
테이프는 해소기침을 앓는 환자처럼, 혹은 운명을 감내하는 사람처럼 여전히 발작성 선율을 토해내고 있었다.
삐리리리. 삐리리리. 박여사가 황급히 휴대폰을 귀로 가져갔다.
" 왜 이렇게 늦게 연락을 늦게 한거야. 나, 전번 그곳으로 가고 있으니까 빨리 나와."
" 핑계를 만들면 되잖아. 10분이면 도착할거야."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고 가속기를 밟고 있는 발에 힘을 주었다.상대방, 그가 우리를 발견하고 재빨리 차에 올라탔다. 승용차는 서울을 벗어나 울창한 광목수목원 사이의 아름드리 나무들 사이를 발정난 수캐처럼 달렸다. 한참을 색색거리며 달리던 승용차가 정원이 아름다운 모텔 앞에서 멈췄다. 트렁크를 열고 비스킷과 우유, 그리고 껌을 가져다가 신문지 위에 놓아두고 유리문을 4센티미터 정도 열어 둔 채 밖에서 문을 잠갔다.
" 나, 아침도 못 먹었어. 먹고 들어가자."
" 어쩌다가 아침도 못 드셨어요?"
" 혜지 때문인징, 남편 때문잉지 몰르겠어엉."
코맹맹이 소리로 대답하며 상대방, 그의 팔짱을 끼었다.
아마, 세 시간 혹은 더 많은 시간을 나는 혼자서 이 좁고 답답한 승용차 안에서 지내야 할 판이다. 다만 좋은 게 있다면 얼마든지 짖어도 나무랄 사람이 없다는 정도이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내 삶의 터전이 바뀌었을 당시에 처음 며칠 동안은 밥도 안 먹고 고집을 피워 봤지만 되돌릴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머잖아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그가 누군지를 구별할 수 있었다. 의원님도 나를 무척 예뻐해 주었고 꼬리를 흔들며 캉캉 짖으면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행복했다.
몇 달이 지나면서 캉캉 짖는 일이, 귀여움과 사랑을 받으려 목이 아프게 캉캉 짖는 일을 놓고 이웃집들이 참을 수 없는 소음이라는 강력한 항의가 들어왔다. 그들은 이웃에 피해를 주는 가축사육을 금지한다는 현행 공동주택관리령 제 5조 3항 조항을 들먹거렸다. 나의 가족들이 누군가에게 말꼬리를 사리는 것이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다음 선거를 위해서 그들의 항의를 묵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뭉개진 박여사는 내가 짖는 것을 멈추게 하려고 김원장에게 자문을 구하여 몇 가지의 방법을 동원했다. 처음엔 손바닥을 펴 보이며 짖지 말라고 고함을 질렀지만 나는 그것을 무시했다. 박여사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단독주택이나 인근의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가자고 의원님에게 조르기 시작했다.
" 주소는 여기에 그대로 남겨두면 되잖아요?"
" 모르는 소리하지마. 차라리 상대 후보에게 내 살점을 떼어주라지. 유권자들이 살지도 않는 사람을 찍어줄 것 같아. 다시는 그런 얘기 꺼내지마."
의원님은 유권자가 밀집하여 생활하는 최고의 주거공간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박여사도 그 그늘의 덕택으로 얻어지는 향유와 자신의 위상이 돋보이는 계단에서 발걸음을 내려놓지 않으려 결국 이사를 포기하고 말았다 .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고뿔에 힘겨운 환자의 기침 같은 캉캉거리는 짖음이 가족들에게 오히려 관심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이번에는 신문지를 말아 슬쩍 때리거나 코를 약간씩 비틀었다. 코 비틀기에도 효과를 얻지 못하자 짖을 조짐이 느껴지면 뿌리개를 이용해서 물을 뿌리는 것이었다.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는 것을 느낀 박여사가 외국의 경우처럼 전기충격을 사용하거나 아예 성대수술을 생각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때부터 나는 기쁘거나 슬픔에 직면해도 짖는 것을 잊고 살았다. 다만 산책을 나갈 때면 가끔 짖어보았지만 별다른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짖기를 그만두었기 때문인지 의원님은 나를 여전히 사랑해 주었다. 그 빌어먹을 장관직에 대한 하마평이 나오기까지는 말이다.
아침까지 굶었지만 식욕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옆구리가 허전한 것이 의원님에게 채였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유를 따져보면 일본여행이 좌절된 까닭이다. 나에게도 일본행은 크나큰 기다림이고 설렘이었다. 정치상황만 안정된 상태였다면 이미 일본을 다녀왔을지도 모른다. 아니, 장관직을 맡게될지 모른다는 하마평만 아니었어도 우리 의원님과 박여사도 여전히 편안한 나날의 연속일 것이고 행복한 삶 속에 젖어있을 것이다.
지금 경희씨의 집에서 살고있는 엄마가 새삼 보고싶다.
우리가 헤어지던 그 순간 엄마는 귀여움 받으며 잘 살라는 한 마디를 남기고 안방으로 들어가 내가 박여사의 품에 안겨 그 집을 나올 때까지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나는 품에서 벗어나려고 캉캉 짖으며 손등을 할퀴려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고 오히려 무척 영리하다며 머리까지 쓰다듬었다.
엄마는 우리의 이별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헤어지기 전날밤에 엄마는 자신도 할머니에게 들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종족의 고향은 지중해의 중앙에 해당하는 시칠리아 남쪽에 있는 말타(Malta)라는 섬으로 예전에는 영국의 땅이었지만 1964년에 독립하여 지금은 인구 40만 명이 살고있는 곳이다.
지중해는 청백의 조화로 이루어진 바다이고 작렬하는 태양 아래 올리브 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무성한 말타는 그 바다에 마치 진주처럼 떠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아마 짭조름한 바다냄새는 지금도 우리 종족의 혈관 속에 면면히 녹아 흐른다.
우리 가문은 말티즈 집안이다. 고향이 말타섬이어서 사람들이 흔히 말티즈종이라 부른다. 처음엔 영국의 상류층에서 기르다가 지금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간혹 모습이 비슷하여 스피츠 가문과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별종임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몸은 긴 면사포 같이 새하얀 털로 뒤덮여 있고 겉모습만 하얀 것이 아니라 마음도 깨끗하고 성질이 온순할 뿐 아니라 강직한 충성심으로 어느 누구에게나 사랑을 독차지하는 집안이다. 애완견의 대부분이 작은 신체를 가졌듯이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몸체가 2,30센티미터 정도이고 몸무게도 이,삼 킬로그램에 불과하다. 스스로 완벽한 애완견의 조건을 갖췄다는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한 가문이기에 가족 모두가 나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금방 무엇이건 싫증내는 박여사가 나를 이토록 좋아하는 것을 보면 가끔은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지만 하옇튼 나에게 쏟는 정성은 각별하다.
푹신하고 따스한 보금자리에서 일어나면 식모 아줌마가 예쁜 용기를 가져다준다. 용변을 보고 나면 맛있는 소고기 요리가 나의 코를 자극한다. 충치예방 껌을 먹고 나면 잠옷을 벗기고 조깅복을 입혀준다. 박여사와 함께 조깅을 다녀오면 아줌마가 향수를 섞은 따스한 물로 씻어주는데 이때가 하루 중 가장 기분이 좋다. 다시 박여사의 손으로 옮겨지면 핸드 드라이로 털을 말려 털 브러시와 핀 브러시로 곱게 빗겨 기분에 따라 머리에 혹은 턱에 리본을 매어준다. 이 모든 것들이 지금은 익숙하고 즐겁지만 처음엔 너무나 싫었다. 특히 무슨 예방주사는 그렇게도 많은지 곤욕이 아닐 수 없었다. 간염, 파보, 파라인프렌자, 렙토스피라는 물론이고 사람이라면 홍역에 해당하는 디스템파 까지 거의 날마다 예방주사를 맞았다. 지금은 일년에 한 번씩만 맞으면 되니까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 오죽했으면 키가 작달막한 간호사의 장단지를 물어버릴까 생각했지만 이 모든 것이 나를 사랑하는 세심한 배려라서 참았던 것이다.
역시 내 마음을 가장 알아주는 사람은 박여사다. 가끔 리본을 앞발로 뜯는통에 꾸중을 듣지만 그것도 이유 없이 뜯는 것이 아니다. 내가 심심해서 소가죽으로 만들어진 껌을 달라고 달려가지만 미련퉁이 아줌마는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결국 꾸중을 듣는 것은 아줌마다.
한번은 내가 사용하는 변기를 씻다가 아줌마가 그것을 깨뜨리는 일이 있었다. 비록 돈으로 계산하면 일십만원에 불과하지만 내 물건이 깨졌다는 사실이 너무나 불쾌했다 결국 아줌마의 월급에서 변기의 값을 제외하고 지급되었다. 내가 사용하는 물건의 대부분이 수입품인데 그 변기도 마찬가지였고 예를 들면 통조림이 6천원에서 3만 5천원이고, 15개가 들어있는 1회용 생리대가 1만 7천원인데 이러한 물건들은 일반적인 용품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일주일에 하루는 퇴계로에 있는 애견센터에 나가 전신미용을 받는데 귓밥을 파주고 발톱을 깎은 후에 샤워로 피부를 마사지하고 일일이 털을 손으로 풀며 말려주는데 온몸이 가뿐해지는 느낌을 받는다. 그 가뿐함도 일본을 다녀온 친구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울적해진다.
일본의 나리타공항 인근의 페페호텔에 여장을 풀고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고 박여사는 애완동물건강관리자 양성소에 등록하려고 한다. 나도 에어컨과 일광욕실이 갖춰져 있다는 페페호텔을 무진장 가보고 싶다. 세계에서 애완견을 위한 물건의 종류가 가장 많다는 미스코시 백화점에서 쇼핑을 즐기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오금이 저릴 정도다.
박여사와 상대방, 그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온다. 고개를 들어 볼 필요도 없다. 모텔에 들어갈 때와 걸음소리가 약간을 다르지만 틀림없는 두 사람의 걸음소리다. 네댓 걸음이면 승용차의 문이 열리겠지.
" 어머, 혜지야. 왜 안 먹었어. 임신 중에는 충분한 영양을 섭취해야 하는데. 아이 속상해. 지금이라도 먹어, 혜지야."
상대방, 그가 음식들을 승용차 트렁크에 가져다 실었다. 상대방, 그는 먹어보라는 한 마디 없었다.
" 언제쯤 만날까?"
" 나, 그렇게 한가한 놈이 아닙니다."
" 시간이 없는 게 아니라 체력 때문이 아니야."
박여사가 입가에 웃음을 물고 눈을 흘겼다.
"개고기를 먹어봐. 끝내준다던데."
" 혜지를 기르면서 여사님이 개고기를 먹어요?"
" 그럼, 식용과 애완용은 근본이 달라. 프랑스의 동물보호협회에서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개고기를 먹는다고 야만인 운운하며 한국상품 불매운동을 벌이며 야단법석이어도 저희들은 구더기까지 먹는다던데. 소고기를 먹여서 키운다지만 우리 나라 사람들은 돈을 주면서 먹으래도 못 먹을거야. 어떤 경우든 그냥 인정하면 그만인거야."
" 우리들 사이를 의원님이 알게되면 그냥 인정할까요?"
질펀한 정사를 나누었을 두 사람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나도 한 달 전쯤에 신방을 차렸었다. 내가 어른이 되었다는 증후가 느껴지자 박여사는 만사를 접어두고 전화기를 붙들고 살았다. 결국 김원장의 주선으로 오교수 집의 보스라는 청년을 신랑으로 맞았다. 혼례를 치르기로 결정되자 나는 무척 바빠졌다. 혼례는 우리 집에서 치러졌는데 모든 진행과정을 비디오로 찍고 사진으로도 남겼다. 혼례가 끝나자 오교수의 부인을 개사돈이라고 부르며 영롱하게 빛나는 다이아몬드 세트를 전달했다. 물론 김원장에게도 충분한 사례를 하였고 보스가 훌륭한 혈통을 가졌다며 2세를 기대해도 좋다는 덕담을 김원장은 잊지 않았다. 박여사는 아주 흡족한 표정이었다.
박여사가 상대방, 그를 신문사 앞에 내려주고 차를 회전시켰다. 어디를 가려는지 나는 벌써 알고 있다. 출가한 딸, 수현씨 집에 가려는 모양이다.
딸은 유치원에 간 아들을 마중 갔다며 식모가 우리를 맞았다. 찻물이 채 끓기도 전에 딸과 외손주 영식이가 유치원에서 배운 노래를 부르며 들어왔다. 그때까지 박여사의 가슴품에 안겨있던 나는 소파로 내려앉았고 대신에 영식이가 무릎을 차지했다. 뺨에 입맞춤하고 좀전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말했지만 할머니의 얼굴조차 쳐다보지 않았다. 핸드백에서 일 만원 권을 꺼내 흔들자 영식은 어느새 거실 한 켠에서 두 손을 모으고 우리집 강아지는 복슬강아지라고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식모가 커피와 과일을 내왔지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딸에게 의원님의 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상대방, 그와 맛있는 음식으로 포식했으니 어쩌면 당연했다. 딸은 어머니의 얘기에는 귀를 기울리지 않고 잠시라도 틈이 보이면 남편이 사표를 내고 변호사 개업을 하려는데 사무실 임대비가 너무나 비싸다는 이야기만 반복했다.
나는 이제서야 배가 고파 박여사의 오른쪽 발등을 핥았다. 쇠고기 스프가 먹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식모가 끓여 온 사골국물에 밥을 말아먹었다.
오후 네 시를 알리는 벽시계의 시보가 홍두깨 방망이질처럼 들려왔다. 박여사가 나를 안고 일어섰다.
" 지금은 사표를 내면 안돼. 늬 아빠에게 걸림돌이 될 수가 있으니까."
나는 딸에게 한 마디를 남기는 박여사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한강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쏟아지는 금빛햇살이 바람에 흔들리는 수면에 부딪쳐 보석처럼 빛나고 있었다. 이렇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세상인데 무엇이 어떻다고 난리법석인지 이해하기 힘들다. 모두들 굶지 않으려 장관이 바뀌든 국회의원이 낮잠을 주무시건 제 나름대로 걸음을 걸으며 비지땀을 흘리고 있고, 세상은 팽팽 돌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장관이 바뀌고 국회의원들이 매일 국회의사당에서 국정(國政)을 놓고 씨름한다고 어제까지 빚더미에 앉은 농부가 돈더미에 앉을 것도 아니고, 한 순간 중소기업의 수출이 늘어, 쏟아진 장대비가 수챗구멍을 흐르듯 외화가 넘쳐날 것도 아니지 않는가. 어쩌자고 세상은 가마솥의 콩처럼 튀는지, 이 세상을 이해하기 어렵다.
아파트의 주차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나는 처음에는 관리비 인상을 반대하는 집회거나, 아파트 건설회사를 상대로 복지시설 확충을 요구하는 집회인줄 알았다. 이상한 것은 그 흔한 현수막이나 피켓 하나 보이지 않았고 질끈 머리띠를 두른 사람도 없었다. 박여사가 승용차를 신속하게 주차하고 그들의 틈을 비집었다.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있는 것은 머리가 새하얀 노부부와 젊은이였다. 아, 그 옆에는 보기에도 끔찍하게 원산지가 러시아인 몸집 큰 볼조이 한 마리가 배가 찢긴 채 죽어 있었다. 나는 품속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젊은이는 지갑을 꺼내든 채 경찰이 도착하면 해결될 일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노부부는 이미 생명이 끊어진 볼조이를 붙들고 망연히 앉아 있었다.
노부부는 거칠고 투박한 옹기 대신에 매끈하고 앙증스런 유리 혹은 스텐레스 그릇을 사용하는 시대에 자식들에게 차마 버리지 못하는 항아리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 싫었다. 노인들은 낡아 사용하지 못하는 짐짝처럼 아들집의 구석방을 거부하고 쌓아 놓은 통 성냥 같은 아파트에서 단 둘이 살았다. 자신들의 항아리엔 세상을 살아온 경험과 지혜가 가득했으나 세상과 자식들에게는 깨어진 도자기 파편보다 쓸모 없는 일이었다. 가슴은 빈 항아리처럼 외로움으로 가득 하였다. 두 사람은 애완견 한 마리를 기르는 재미로 살았다. 비록 말 못하는 동물에 불과했지만 자식을 키우듯 볼조이에게 정성을 쏟았고, 그 정성은 노부부의 파리한 삶에 활력을 주었다. 찾아오는 손님도 가족도 없는 외로운 노부부의 곁에는 항상 볼조이가 있었다.
지금은 기억으로만 남아있는, 추억과 회한이 버물어진 젊은 시절의 얘기며, 자식들을 키우던 이야기를 두런두런 풀어놓아도 볼조이는 조용히 들어주었다. 노인들이 아직은 다행히 건강하였으나 밤새 안녕이라고 했듯이 눈을 뜨면 지난밤 옆자리에 누웠던 남편이, 아내의 안부를 확인하면 이번엔 볼조이가 앞발로 방문을 긁으며 노부부의 안부를 확인했다.
맑은 햇살의 빛이 바래가는 늦은 오후에 노부부는 볼조이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두 노인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아파트 앞산의 약수터로 올라갔다.
한 모금 물을 마시고 벤치에 앉아 날아가는 새들에게 눈길을 주기도 하다가, 이민을 떠난 딸애의 안부가 궁금하여 안타까웠던 마음도 초등학교에 다니는 손주 녀석의 얘기로 흐뭇한 마음이 되었다가, 가끔은 낯익은 노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노부부가 벤치에서 일어나자 눈치가 빠른 볼조이가 숲속에서 달려나와 노인의 얼굴 근처까지 펄쩍 뛰어 올랐다. 아파트 근처에 이르렀을 때 볼조이는 이미 죽어있고 젊은이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이, 타고 온 오토바이보다 몸집이 큰 경찰이 도착하여 자초지종의 얘기를 들은 경찰이 노부부의 앞에 쭈그려 앉았다.
"할머니, 좋은 게 좋은거라구요, 없었던 일로 하세요."
" 우, 우리 개가 이렇게 죽, 죽었는데 없던 일로 하라고."
할머니가 볼조이의 머리를 자신의 품으로 감싸며 울부짖었다. 그것은 마치 깊은 밤 늑대의 울음처럼 처절했다. 젊은이는 팔목의 시계를 힐끔 쳐다보고 난감한 듯 귀찮은 표정으로 경찰관을 바라보았다.
"할머니, 붙들고 있는다고 다시 살아날 수는 없잖아요. 교통만 마비될 뿐."
" 이 개는 소식 없는 아들보다, 전화 한 통 없는 이민간 딸보다 가까운 내 가족이나 마찬가지야."
" 할머니 진정하세요. 사실 법으로도 개는 묶어서 기르게 되어있어요. 지금의 상황은 할머니가 오히려 벌금을 물어야 할 형편이에요."
박여사가 혀를 차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모 아줌마가 벌건 얼굴로 문을 열어주고 재빨리 비디오를 껐다. 그 비디오는 나의 혼례를 찍은 테이프였다.
"오교수 집에서 전화 왔었어요."
아줌마가 주방으로 향하며 건조하게 내뱉었다. 박여사가 즉시 전화번호를 눌렀다.
" 그래요. 정교수가 딸애를 원한다고요?"
" 예정일이 정확히 24일 남았어요. 걱정 말라고 하세요. 예, 예. 혜지도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상냥함이 지나치다 싶은 전화를 끊고 박여사는 꽃 같은 얼굴이 되어 나를 자신의 얼굴 높이까지 들어올렸다.
" 혜지이, 정교수 집에서 네가 새끼를 낳으면 한 마리 분양해 달라는구나. 사례금도 충분히 주겠다고. 그것보다 정교수의 아들이 뭐하는줄 아니? 국세청에 근무한다. 국세청 징수과에."
박여사가 내 코에 입을 맞추고 또 전화번호를 눌렀다. 정교수의 집이었다. 식모아줌마가 유자차와 내가 먹을 전복 죽을 가져왔다.
" 저어, 사모님. 20만원만 가불했으면 좋겠는데요."
" 어떡하죠. 지금 돈이 없어서."
피곤한 척 기지개를 켜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박여사의 뒷모습을 아줌마가 망연히 바라고 있었다. 간단히 세면을 끝내고 얼굴에 맛사시 크림을 문지르고 티슈로 닦아냈다. 다시 갈색의 머드팩을 덕지덕지 바르고 침대에 누웠다. 아마 침대에 누워 의원님과 싸울 전략을 수립하고 있는지 모른다. 지금은 머드팩으로 숨겨진 얼굴이 의원님이 들어오면 도깨비 방망이 모양의 풍선처럼 부풀어오를 것이다.
전화벨이 울리고 마동국 의원의 집이라는 아줌마의 음성이 들리고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건네지는 무선전화기와 객지도 아닌 외국에서 돈이 떨어지면 낭패라며 내일 은행이 업무를 개시하면 바로 천 달러를 송금하겠다는 통화가 들리고 전화가 끊어졌다.
벽시계를 보면서 나의 이브닝드레스를 가져오라고 아줌마를 향해 입을 열었다. 방문이 열리고 아줌마의 손에는 이브닝드레스가 아닌 큰 가방이 하나가 들려 있었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희망으로 남은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하여 살아간다는 아줌마가 고개를 깊게 숙였다. 황급히 핸드백을 들고 아줌마를 붙잡았지만 뿌리치고 현관문을 나섰다. 왠지 아줌마의 모습이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박여사는 중화요리 집으로 전화로 음식을 주문하여 걸틀지게 저녁을 먹고 상대방, 그에게 전화를 걸었고 김원장에게 전화를 걸었고 희경씨에게 전화를 걸어 한참을 수다를 떨었다. 수다에 지친 박여사는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있을 때 의원님이 귀가하였다. 장식장에서 손에 잡힌 양주를 집어들고 냉장고에서 과일과 얼음을 꺼내 소파에 앉아 신문을 들추고 있던 의원님에게 가져갔다. 한참을 아양을 떨다가 내가 안정을 찾으면 기어코 일본을 가겠다는 말에 의원님은 재떨이를 집어던지고 말았다. 청동 재떨이가 굴러 내 발 앞에서 멎었다.
" 제발, 어린애 같은 얘기 그만해. 이렇게 고생하며 입각하려는 게 나 혼자 잘살기 위해서야? "
" 그럼, 나를 위해서에요? 모든 것이 지금도 충분해요."
" 아버님의 위상에 맞는 아들이 되려는 나의 마음을 몰라서 그러는거야!"
" 아버님을 핑계 삼지 말아요. 당신에게는 가족보다 욕망이 소중하잖아요."
" 아니야, 믿어 줘. 왜 그렇게 내 처지를 이해 못하고 보채는거야. 혜지는 지금으로도 충분하니까 조금만 기다렸다가 일본을 가든지 미국을 가든지 알아서 하란 말이야.
물론 나도 현재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 나라도 필요한 물건은 얼마든지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일본을 간다는, 갔다는 것이 커다란 자부심이고, 박여사는 일상의 허무를 일본행에서 위로와 보상을 받으려는 것이다.
" 꼭 특별한 물건이 필요해서 일본을 가려는 것은 아니......"
박여사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감싸며 울음을 터트렸다. 텔레비전 속의 드라마는 거실에서 과일을 먹으며 행복한 웃음소리를 흘리고 있었다.
누구보다 행복한 가정생활이었지만 어느 순간 점차 외톨이가 되어 가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 세상은 온통 검은 장막이었다. 탁자에 향기로운 꽃병을 놓아두어도, 머리모양을 바꾸어도 그 누구도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종일토록 가족이 귀가할 시간을 기다리지만 모두가 따로국밥이었다. 애들이 성장한 만큼 슬하에서 멀어졌고 가족은 바람에 제각각 굴러가는 낙엽이었다. 대화를 나눌 틈이 없는 가족들은 제각기 다른 시간에 아침을 먹고 집을 나서면 집안에는 움직이며 소리가 있는 것은 텔레비전의 화면과 시계추 뿐 이었다. 딸이 결혼하여 떠나고, 아들이 유학을 떠나면서 가족은 먼 우주에서 날아온 외계인이 잠시 머물다 떠나버린 느낌이었다. 부엌일을 맡아줄 가정부를 구하고 자신은 여러 가지 취미생활을 시작했으나 구멍난 가슴은 오히려 찬바람만 휑하게 불었다. 의원님은 모르고 있지만 자원봉사단체도 가입했으나 결국 서민들과 섞일 수 없는 기름이었다.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은 상태에서 희경씨 집에 들렸다가 칠흑 속에서 불빛을 만났다. 불빛이었던 나는 떠밀리 듯 박여사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의원님은 나의 이름을 진수로 부르자고 제안했었지만 결국 혜지가 되었다.
의원님은 지난 선거에서 떨어진 친구 임진수씨를 생각했었다. 공천을 받지 못한 채 선거판에서 고전하던 임진수는 점쟁이를 찾았고 삽살개의 어원이 살을 �음에 있으니 구해서 기르면 선거에 붙으리라는 점꽤를 내놓았다. 수소문 끝에 삽살개를 구해서 애지중지 길렀지만 결과는 낙선이었다. 임진수는 나중에야 알았다. 그 삽살개가 가짜였음을. 행여 진짜였다면 선거에서 승리를 거뒀을까. 의원님도 무진장 외로웠다. 국회의원을 관두면 그만이겠지만 이미 고기의 맛을 알아버린 땡추가 아니었던가. 먹고, 먹히는 정치판에서 믿을 사람이 없었고 혁대 풀고 마음 편하게 소주 한 잔 마시기도 힘들었다. 의원님에게도 혜지는 위안이었다. 개는 결코 사람을 배신하는 법은 없으니까.
성질을 삭인 의원님이 입을 열었다.
" 아침 일은 미안해. 새끼 밴 개를 차고 싶었겠어."
" 아니, 당신은 혜지가 아니라 나를 차버리고 싶었던 거예요."
박여사가 울음을 그치고 소리를 질렀다.
" 왜 내가 당신을 발로 차고 싶다는거야."
"우리가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고, 잠자리에 들어본 것이 언젠줄 아세요?"
"당신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즐겨왔잖아. 오늘도 그랬고."
박여사가 놀란 토끼 눈으로 의원님을 바라보았다. 의원님의 얼굴은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섹스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그럼, 일본행이 외로움을 씻어 주는 처방인가?"
섹스도,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도 외로움의 특효약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가 어찌 모르랴.
박여사는 여전히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며 술병을 들어 그대로 입으로 가져가다 갑자기 나를 향해 던졌다. 순식간에 날아온 술병은 나의 정수리에 정확하게 맞았다. 그 고통도 대단했지만 무엇보다 나의 영원한 박여사의 돌발적인 행동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한숨을 길게 내쉬고 의원님이 담배에 불을 붙이자 나는 정신이 아득한 상황에서도 재떨이를 가져다주려고 입을 가져가는 순간에 의원님이 라이터를 던졌고 나는 왼쪽 눈알이 빠지는 듯한 고통에 술병을 맞고도 참았던 비명이 새어나왔다. 살아가는 일이 어찌나 힘들고 고달픈지 눈물이 저절로 흘러 나왔다.
흩어진 술병의 파편처럼 내 마음은 복잡했고 머리가 지끈거리고 눈두덩이가 부어 올랐지만 두 사람은 마치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동상(銅像)처럼 앉아 있다.
실어증 환자가 갑자기 말문이 열리듯 텔레비전이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뉴스 속보를 내보냈다.
" 시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익명을 요구한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내일 오전에 개각이 단행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번 개각은......"
동시에 의원님과 박여사의 귀가 쫑긋 솟았고, 눈에서는 밝은 빛이 발산되어 사방이 환해지기 시작했다.
술병에, 라이터에 맞아 눈 앞은 캄캄하지만 내 머리속이 개운해지며 밝아지는 느낌이다. 그 느낌과 동시에 엄청난 배고픔이 엄습한다. 이제 거실의 동상이 피돌기를 시작하였으니 어쩌면 늦은 저녁밥을 챙겨 줄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아줌마까지 떠나버렸으니 내일 아침도 장담할 수 없잖은가.
아, 누가 말했던가. 개 팔자가 상팔자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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