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라

살아난 복통

然山 2008. 5. 14. 16:37

(단편소설)

 

 

살아난 복통

 

 

일기예보를 끝으로 저녁 9시 텔레비전 뉴스가 끝났다. 정말 눈이 내리려는지 유리창을 흔들던 바람이 잦아졌다.
손녀딸 정애가 목강스럽게 칭얼거렸지만 며느리는 곁눈질 한 번 없이 뜨개질에 열중했다. 잠시 손을 놓고 허리를 두드리는 며느리의 얼굴에 피어있는 기미가 안쓰러웠다. 며느리는 정애를 낳고 몇 해가 지나도록 소식이 없어 발걸음조차 조심했었다. 맹꽁이처럼 불룩한 배를 보면 마음의 무게를 한 켜 벗겨 준 며느리가 고마웠다. 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며느리는 토골댁의 만류로 부엌이 아닌 아랫목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것이 미안한지 토골댁의 조끼를 짠다고 늦은 밤까지 바늘 코를 꿰었다. 아랫목에는 고양이가 팔자 늘어진 기생오라비 모양으로 잠들어 있었다. 토골댁은 가래 끓는 듯한 고양이의 숨소리가 싫어 이마에 밭고랑을 만들며 플라스틱 라이터를 집어 던졌다. 고양이가 느긋하게 일어나 자신이 부숴 놓은 장난감의 팔목을 건들며 건중건중 재롱을 떨었다.
울음을 그친 정애가 눈물이 채 마르지도 않은 자닝스런 표정으로 텔레비전에 넋을 잃고 있었다. 화면에는 건강한 노인이 건강식품을 광고하면서 환한 웃음을 만들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저승꽃이 자리를 넓혀가고 있었다. 담배를 꺼내 거실로 나왔다. 그때 지랄병을 앓듯이 전화벨이 울렸다.
토골댁은 수화기를 내려놓고 우두망찰 한숨부터 쉬었다. 며느리가 고개를 돌리며 눈치를 살폈다.
" 애비야, 어쩜 좋으냐 ? 할무니가 글쎄 농약을...... "
부서진 장난감을 조립하고 있던 아들이 일어나 외출복으로 갈아입었다. 며느리가 물에 담근 쌀처럼 부은 얼굴을 애써 숨겼다. 하지만 V 자의 양미간 사이에 귀찮은 표정이 또렷하게 숨어 있었다.
" 위독하데요. 언제 오실거예요 ? "
" 일단 가봐야 알지. "
" 연락하마. "
무뚝뚝한 아들의 대답에 자신의 목소리는 주파수가 맞지 않은 라디오의 잡음소리 같았다. 며느리가 하품을 길게하고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내 두 개의 자물쇠를 잠그는 쇳소리가 밤하늘로 울려 퍼졌다. 그 소리는 불만을 겉으로 드러내면서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으려 마음에 빗장을 채우는 여운으로 남았다. 서운함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울대에 걸렸다. 토골댁은 침을 꿀꺽 삼켰다. 담장 위로 삐죽 얼굴을 내민 동백나무가 유리창에서 흘러나온 불빛에 도저히 헤쳐 나오지 못 할 적막한 정글의 늪처럼 느껴졌다. 그 늪에서 어머니가 허우적 손을 휘저었다.
" 동백은 뭣하러 키우세요 ? "
" 내가 살믄 을마나 살것냐 ? 나 죽으믄 묏동에 심어 주라고 그란다."
팔뚝 굵기의 동백 한 그루가 옹기에 안겨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배를 받으신 친정 아버지는 물수건으로 잎사귀를 정성스레 닦았다. 토골댁은 고추를 먹은 듯 가슴이 알싸했다.
" 내가 거동 할 수 있을 때 하나라도 준비를 해놔야...... 지난 윤년에 늬 엄니거랑 수의도 마련해 놨고 묏자리도 봐 놨다. "
당신이 마련한 가묘(假墓)는 뒷 텃밭의 양지녘에 자리하고 있었다. 계절이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삽이나 낫을 들고 황톳길을 오르고 내렸다.
아버지는 노을로 물든 자신의 삶이 오래도록 햇살이 비추기를 바라지 않았다. 텔레비전을 리모콘으로 간단하게 조작하듯 삶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늘상 안타까워했다. 바다의 부표처럼 세상살이에 떠밀리면 생을 갈무리하여 자식들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소박한 꿈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오래 전부터 끈질기게 낫지 않는 어머니의 배앓이는 당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짐이었다. 대도시의 종합병원에서 진찰을 받아 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을 아들 병환에게 꺼내지 못했다. 손에 쥐어준 게 없으니 받지도 않겠다는 마음이었다. 물론 누구보다도 아버지의 바람을 잘 알고 있는 병환이었지만 한 마디 언급하지 않았다. 가끔 약국에서 위장병 약을 사 왔지만 아무런 약효가 없었다. 병환은 농사가 잘 되어 돈이 잡히면 종합병원의 진찰을 염두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묵묵부답인 병환이가 서운했다. 차마 병원 얘기를 꺼내지 못하는 병환의 마음은 이미 오래 전에 대못이 박혀 있었고 아버지도 마찬가지로 새까만 숯먹이 가슴이었다. 원수놈의 가난을 향해 한숨이나 내쉬는 게 고작이었다. 병환이의 속마음도 알지 못한 채 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들에 대한 서운함을 삭히느라 아버지는 노인정에서 동무들과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 동네 앞 춘정강 다리에서 실족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지랑이가 개나리 허리에서 가물거리던 올 봄이었다. 아버지는 자신이 찍어 놓은 하얀 고무신의 발자국을 따라 영원한 길을 떠났다. 가신 님의 흔적을 가슴속에서 잉걸불로 지키던 어머니까지 동백이 한 번도 꽃망울을 피우지 못했는 데 꽃이 아닌 서러움이 가득한 붉은 피꽃을 피우려 한다니.
" 눈이 내리는 데요. "
아들의 목소리가 마치 동굴 깊숙한 곳의 울림처럼 들려왔다. 토골댁은 재빨리 눈가를 훔치고 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첫 눈이 많이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 하던가. 그렇지만 토골댁은 하얀색이 싫었다. 그래서 눈도 결코 좋아하지 않았다. 제법 소담스레 내리는 눈송이에서 끝이라는 단어가 낚시 끝에 매달린 물고기처럼 파닥거렸다.
지금의 정애 애비가 세상에 태어나 옹알거림을 시작 할 무렵에 남편을 잃었다. 동네 사람들과 약초를 캐러 떠났던 일요일, 그 아침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을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하얀 점퍼 차림으로 대문을 나선 남편을 산의 품에 빼앗겼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허겁지겁 달려갔지만 남편은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병원의 영안실에서 만나 본 주검 사이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독경 소리만 속절없었다. 밀가루가 바람에 날린 듯 어지러운 향불은 토골댁의 마음을 더욱 찢어 놓았다. 남편의 손짓처럼 일렁이는 촛불을 보고 참고 참았던 눈물 한 방울이 하얀 소복에 떨어졌다. 등에 업힌 아이가 칭얼거렸다. 토골댁은 이를 깨물며 마음을 사려 먹었다. 생선 광주리를 머리에 얹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행상을 시작했다. 고무신이 닳는 것도 아까워 호젓한 길에서는 벗어 쥐고 동네가 눈에 들어오면 신발을 꿰었다. 물집이 생겨 아물고 그 위에 또 굳은살이 박혔다. 건강하게 자라는 아이의 똘망똘망한 눈동자를 보면 끓는 물에 데친 시금치 같은 몸에 기운이 돌았고 피곤도 잊었다. 팔자를 고치라는 친정 아버지의 성화에 토골댁은 뭍에 오른 물고기처럼 펄쩍 펄쩍 뛰었다. 그러한 소리를 귀에 담는 것조차 죄라고 여겨졌다.
토골댁은 반대편에서 비쳐오는 부채꼴의 전조등 불빛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운전석에 앉은 아들의 옆모습에서 피곤이 뚝뚝 떨어졌다. 불쌍한 녀석. 애비없는 자식이라는 소리를 가슴에 문신으로 새기며 늘상 눈물에 절어 살아야 했던 아들이었다. 그래도 토골댁의 유일한 버팀목이었고 등불이었다.
아들이 다니던 출판사를 그만 두고 빚을 얻어 서점을 시작했을 때 토골댁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금새 빚을 갚고 아담한 집도 한 칸 마련해 토골댁의 이름을 새긴 문패를 대문에 붙여 준 아들이 고마웠다. 한 번은 술을 즐기지 않는 아들이 인사불성이 되어 들어왔다. 일찍부터 며느리로 얼굴을 읽혀 왔던 인순이의 부모가 과부의 자식이라고 반대해 결국 헤어졌음을 알았다. 가슴을 찌르는 통증이 엄습했다. 토골댁은 어떠한 위로의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천장의 무늬가 쇳토막이 되어 사정없이 쏟아졌다. 칼바람 보다 매서운 세상을 살아오면서 큰 숨 한 번 쉬지 못한 채 주눅이 들고 두려워했던 과부의 자식이라는 그 한 마디가 날카로운 못이 되어 온 몸을 찔렀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핏방울이 몸뚱이를 흠씬 적셨다. 그날밤 토골댁은 장농 깊숙하게 숨겨둔 사진을 꺼내놓고 죽은 남편을 원망하며 눈물로 밤의 어둠을 하얗게 씻었다. 누렇게 변색된 사진은 가시밭 세월을 간직하고 있었다.
후사경에 비친 자신의 귀밑머리 흰머리가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이 세상에 발 딛고 있을 날이 얼마나 될까. 조금도 미련은 없었다. 토골댁은 죽음과 가까워진 어머니를 생각하고 불손한 자신을 꾸짖었다. 한 해를 마감하는 계절에 팝콘 같은 눈송이가 차창으로 달려들었다.
비릿한 병원의 소독약 냄새가 빈 속을 자극해 헛구역질이 나왔다. 신음소리와 비명의 입자들이 응급실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낡은 가죽같은 어머니의 얼굴엔 주름살이 시냇물로 흐르고, 산소 호흡기에 의지해 느릿하게 숨을 쉬고 있었다. 토골댁은 뜨거워진 눈자위를 옷소매로 찍어냈다.
급박한 앰뷸런스 사이렌 소리가 점차 가까워지더니 부산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20대 초반의 청년이 들것에 실려 들어왔다. 의사가 눈동자를 살피고 청진기로 가슴팍을 짚었다. 환자의 어머니가 대상이 확연하지 않은 욕설을 한바탕 퍼부었다. 의사가 껌을 재근재근 씹고있는 간호사에게 가망이 없다고 귀엣말을 하였고 간호사는 오히려 안도의 표정이었다. 토골댁은 의사에게 어머니의 상태를 조심스럽게 물었다.
" 걱정하지 마십시오. 순환기 장애 때문에 부정맥(不整脈), 심실세동(心室細動). 그리고 중추신경 장애로 안구진탕(眼球震湯) 등의 증세가 나타나 바르비탈제와 아세트산아미드...... "
의사는 주문을 외우는 무당처럼 거침없이 의학용어를 주절거렸다. 의사가 간호사에게 눈짓을 보냈다. 위세척을 시작했다. 어머니의 산소 호흡기를 벗기고 시커멓게 변해버린 입을 벌린 후에 고무토막을 물렸다. 그리고 고무호스를 집어넣어 물을 주입했다. 배가 빙빙해진 환자의 몸을 숙여 토하게 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다음에는 링거의 호스에 제독 제를 주사했다. 토골댁은 위세척을 하는 간호사들의 경직된 모습에서 정애가 좋아하는 만화영화의 로봇을 떠 올렸다. 어머니가 쏟은 토사물은 마치 시궁창에 떠오른 부패물 같았다. 숨이 막히고 눈자위에 눈물이 고이게 하는 악취가 진동했다.
" 외삼촌은 휴게실에 있던데요. "
정애 애비가 혼자 말처럼 일러주었다. 휴게실로 향하는 복도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비상 경광등처럼 깜박거렸다. 동생 병환이가 나무의자에 앉아 담배를 문 채 뭔가를 열심히 끄적이고 있었다. 일어나 인사를 던지고 담배를 내밀었다. 토골댁은 입안이 모래를 씹은 것 같아 손사래를 쳤다. 정애 애비가 자판기에 동전을 넣었다. 돈을 삼킨 기계가 졸리운 눈망울을 껌벅이며 메뉴판 아래에 와이셔츠 단추 크기의 불을 밝혔다.
" 애비야, 건강을 생각해서 커피는 묵지 말어라. "
토골댁은 흰소리 한마디를 잊지 않았다. 율무를 뽑아온 아들이 옆자리에 앉았다. 이음새 사이에서 신경통을 앓고 있는 환자처럼 찌그덕 소리가 들려왔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오는 율무의 구수한 냄새가 텅 빈 위장을 뒤집었다. 끈끈한 점액질이 발성부를 막아버렸는지 굳은 얼굴로 서로 눈치만 살필 뿐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마치 햇살 한 자락 비쳐들지 않는 바닷속 깊숙이 잠수해 있는 느낌이었다. 벽시계의 초침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병환이가 말아 쥐었던 신문지를 펼쳤다. 여백마다 숫자를 계산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빈 공간을 찾아 숫자를 나열했다. 토골댁은 달궈진 돌멩이가 끓어오르는 기분에 휩싸였다. 어깨에 상여를 매고 언덕을 오르는 행렬이 아른거렸다.
" 키우던 개도 아니고 아부지가 돌아가셨어. 돈이 그렇게도 아깝디야. 아부지의 혼이 저승에도 못 가고 구천을 헤매것다. 동네 사람들 챙피해서 고개를 못 들것다. 이눔아. "
토골댁의 목소리에서 쇳가루가 묻어 났다. 충혈된 두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듯 하였다. 병환이는 술기운이 돌아 붉은 물감을 뒤집어 쓴 얼굴이었다. 토골댁의 상복 옷고름 끝에서 서러움이 반짝 빛났다. 아련히 타들어 가는 향불을 따라 슬픔보다 더 진한 배신감과 분노가 피어올랐다. 당신의 명을 다하지 못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죽음이 너무나 원통했다. 아버지의 혼이 승천도 못하고 물귀신으로 남아있을 춘정강에서 살풀이라도 크게 벌이고 싶었다. 그리고 마지막 가는 길까지 지긋지긋한 가난을 상여에 얹어 보내기 싫었다. 가난의 끈을 싹뚝 잘라 버리고 홀가분하고 쓸쓸하지 않은 저승길을 배웅하고 싶었다. 그래서 장례를 호화롭게 치르기를 바랬다. 손가락질을 받아도 좋았다. 그것이 토골댁의 마음이었다. 관을 쑥돌(烏石)이 아니면 행자관으로 준비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상주인 병환이는 한사코 소나무 관으로 준비를 하였다. 성대한 장례를 지낸다고 죽은 사람이 아느냐고 핏대를 올렸다. 토골댁은 오동나무 관이라도 쓰자고 애원했지만 병환이는 먼 산을 바라 볼 뿐이었다. 핏줄을 나눈 동생이 너무나 야속했다. 상복도 마찬가지였다. 마포나 삼베가 아닌 무명에 치잣물을 들여서 입었다. 가난에 한이 맺힌 탓이겠지만 어릴적 다정했던 모습은 눈곱만큼도 보이지 않았다. 딸은 자식이 아니냐고, 돈 있으면 누님의 생각대로 장례를 치르라고 눈을 부라렸다. 어쩔 수 없었다. 서러운 마음을 눈물로 달래며 어머니에게 발길을 옮겼다.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이 흔들렸다. 이웃에서 넘어 온 감나무 가지 때문에 음산한 기운이 감돌았다. 비녀 대신에 하얀 광목띠로 쪽머리를 묶은 어머니가 조각상처럼 멀건히 앉아 있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영정을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다고 곰팡이 피고 습기가 눅눅한 뒷방을 고집하였다. 옆집 할머니가 치맛자락에 코를 풀고 얼굴을 닦았다.
" 엄니, 기운을 내시요. 아부지는 천당에 가셨을 것인 게. "
" 그려. 내가 늬 아부지 몫까지 살아야쟤...... 몹쓸 영감탱이. "
" 좀 쉬쟤 그라요 ? "
" 머잖아 늬 아부지를 따라가믄 편하게 쉴틴디 뭘. "
어머니가 허리춤에서 쌈지를 풀어 한 숟갈의 소다를 털어 넣고 주전자를 집어들었다. 손수건으로 입가를 훔치고 소다 봉지의 주둥이를 노란 고무줄로 묶어 허리춤에 찼다.
소다가루 복용은 당신의 유일한 위안이었고 어머니의 삶을 지탱해 주는 노둣돌이었다.
몇 년 전 느닷없이 어머니는 복통을 호소하며 안방을 뒹굴었다. 검진을 마친 의사는 별다른 증상이 없다며 안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배앓이는 낫지 않았다. 좋다는 약도 소용없었고 어머니는 항상 소다가루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다. 어머니는 쑥이나 익모초를 비롯한 민간요법과 병원에서 일러준 식이요법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장례가 끝나고 토골댁은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를 모시고 종합병원을 갔다.
" 나이가 많아 기운이 쇠하고 신진대사가 원활하지 못하면 간혹 그러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영양이 풍부한 음식을 드시도록 하세요...... 에, 혹시 집안 식구 중에 예전에 위장병으로 고생한 분이 있었나요 ? "
" 그것도 유전이 된다요 ? "
" 아닙니다. 다만 특정한 일에 심리적인 강박관념이 심하면 그 병이 자신의 것으로 인식되어 유사한 증세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어떤 사람은 그 아버지가 신장병으로 죽자 똑 같은 병을 앓았다는 임상기록이 있거든요. "
포승줄에 묶여 있던 기억이 일순 피돌기를 시작하며 맥박을 뛰었다.
맹물로 채운 뱃속은 수챗구멍을 흘러가는 개숫물 소리를 냈다. 어린 남매는 서리를 맞은 호박잎 같았다. 어쩌다 보리밥이라도 먹는 날이면 어머니는 배탈이 났다며 두 남매의 그릇을 가득 채워 주고 눈물로 뱃속을 채웠다. 추수가 끝난 들녘을 휘돌던 바람이 방안으로 몰려들었다. 어느날 저녁 병환이가 배를 움켜잡고 얼굴이 시퍼렇게 변하면서 사색이 되었다. 어머니가 된장물을 먹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의사가 맹장이라고 진단했다. 수술비가 막막했다. 친척들 역시 똥구멍이 찢어지는 형편이었다. 어머니는 제대로 먹지 못해 늘 사산(死産)이었기에 집안의 대가 끊어질 판이라고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서두르지 않으면 복막염이 되어 생명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입술이 부르트고 부황 든 얼굴의 눈빛만이 허공으로 쏟아졌다. 장대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에 아버지는 집을 나섰다. 나이가 들어 어머니에게 들어 알았지만, 아버지는 인접한 마을의 어느 부잣집의 황소를 훔쳐 수술비를 마련했다. 그후 아버지는 정신병을 앓았다. 궂은 날씨가 되면 증후가 나타났다. 무릎을 꿇고 소 울음소리를 내면서 방안을 기어 다녔다. 난폭해졌다가 서럽게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제 정신을 찾아도 당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했다. 날씨에 따라 아버지를 뒷방으로 모시고 밖에서 자물쇠를 채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도 잠에 들면 소가 커다란 눈에서 피를 흘리며 날카롭게 뿔을 갈아세우고 달려드는 가위에 시달렸다고 덤덤하게 말했었다. 그렇게 병환이의 목숨을 건졌다. 시간이 약이었던지 아버지의 병환을 시나브로 치유되었다.
죄의식과 가난의 잠재의식들이 어머니의 소다가루 복용과 질긴 끈이 묶어져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응급실에 누워있는 어머니는 지금도 옆구리에 소다가루의 쌈지를 꿰고 있을까.
형광등의 안정기 소리만이 휴게실의 공간에 부서졌다. 너무나 고요하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입을 꼭 다문 무표정의 모습에서 긴장과 초조가 묻어 났다.
" 이 쥑일놈아, 엄니가 농약을 마시도록 뭘 했냐 ? "
" 면목없소...... 뒷골 하우스에서 고추에 물을 주고 있는디 숙자 엄니가 읍내에 나감서 엄니가 친구들을 찾아 댕기드라고 혹시 서울 누님 집이라도 가느냐고 묻습디다. 이상한 생각에 집에를 가본께 엄니가 막 약을...... "
밤 세시를 알리는 시보가 아득한 홍두깨 소리처럼 들려왔다.
" 급하게 차를 불러 읍내에 있는 병원에서 응급처치를 하고 지금 병원으로 옮겼구만이라. "
토골댁은 일어나 화장실을 찾았다. 문을 잠그고 좌변기에 앉아 물을 내리고 소리내어 마음껏 울었다. 울지 않고는 버티기 어려웠다. 수도꼭지를 돌렸다. 몇 번이고 입안을 헹구었다. 복도의 형광등은 피곤도 모르는지 변함없이 껌벅거렸다. 담배를 한 개피 물었다. 성냥의 유황이 타면서 불꽃이 일었다. 나무로 옮겨지면서 불이 잦아졌다. 손끝에 온기가 전해지더니 곧 뜨거움으로 변했다. 불꽃이 점차 작아지면서 흔들렸다. 뜨거움은 더욱 심했다. 죽음이 손짓 할 수록 삶의 애착은 더욱 강해지는 법인데 어머니는 닳은 삶의 그릇을 스스로 깨뜨리려 하였다. 아버지의 몫까지 살겠다며 꼬박 꼬박 식이요법을 지켰던 어머니였는데. 깊숙이 넘긴 담배연기가 목구멍에 막혀 심한 기침이 나왔다.
" 저어, 누님...... 의사가 그런디 그냥 퇴원해도 되것다고 그랍디다. "
" 죽어 저승 갈 때 돈 싸들고 가그라, 싸들고 가. 이눔아. "
" 누님, 그것이 아니고...... "
동생과 같은 의자에 함께 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 내렸다. 응급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후들거렸다. 누구든 부여잡고 하소연을 늘어놓고 싶었다.
청년은 이미 영안실로 옮겨지고 없었다. 그가 누웠던 하얀 시트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죽음의 전령만이 껄껄 웃고 있었다. 토골댁은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수세미처럼 거친 손이 차가웠다. 토골댁은 자신의 눈자위를 훔쳤다. 구석에 설치된 스팀이 칙칙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눈물처럼 물방울을 똑똑 흘렸다. 어둠의 저편에는 하얀 눈이 긴 겨울밤을 지키고 있었다.
" 예. 퇴원해도 괜찮습니다. 물론 알고 계시겠지만 농약에는 살충제와 살균제로 크게 구분됩니다. 할머니가 마신 것은 살충제로 독성이 작은 겁니다. 마신 양도 극히 소량이고요. 물론 입원을 하시면 더욱 좋겠지만 저 분께서 퇴원의 뜻을 비췄고, 어쨌든 큰 문제는 없을겁니다. 물을 많이 마시도록...... "
어디선가 맷돌 돌아가는 소리가 귓전으로 부서졌다. 눈앞에서 아지랑이 무리가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온 몸을 끓는 물에 데인 듯한 아픔이 미세한 신경까지 퍼졌다. 병환이의 소매를 잡고 늘어지며 애원했지만 막무가내였다. 토골댁은 정애 애비를 찾았다.
" 저어, 차를 빌리러 갔구만이라. "
" 뭔 차를 ? "
" 조카의 차는 좁은 게 엄니를 모시고 갈 차요. "
한 마디 말도 없이 병원을 나선 아들이 야속했다. 내심 부담스러워 했구나 하는 생각에 마지막 비상구조차 막혀 버린 기분이었다.
눈은 멈췄지만 밤사이에 쌓인 눈이 길바닥에 얼어붙어 모든 차량이 아장걸음이었다. 봉고차는 도심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먹장구름으로 가득했다. 금새라도 눈을 흩뿌릴 낌새였다. 정애 애비는 눈이 부신지 자꾸만 얼굴을 찡그렸다. 먼저 지나간 바퀴 자국이 반질반질 윤이 났다. 시커멓게 타버린 토골댁의 가슴과는 정반대로 창밖의 풍경은 온통 백색의 물결이었다. 가로수의 앙상한 가지에 붙은 눈송이들이 바람에 날렸다. 펼친 의자에 누워있는 어머니의 표정은 조금도 변화가 없었다. 고통스러워 찡그린 얼굴을 보여 준다면 차라리 안심이 될 것 같았다. 면소재지를 지나 시멘트 포장길로 들어섰다. 저 만큼 수덕산 중턱의 장군바위가 하얀 갑옷으로 치장하고 있었다. 새롭게 일어서는 뼈저린 기억들이 또 토골댁을 울렸다. 춘정강이 다가왔다. 예나 지금이나 맑기는 여전했다. 물의 수면에 아버지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토골댁은 속으로 아버지를 불렀다. 대답이 없었다. 동네 어귀로 들어 서면서 아직도 거두지 못한 감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나뭇가지에 전구를 매달아 놓은 것 같았다. 노인들만 남아있는 농촌의 모습이었다. 나뭇가지에 새들이 앉아 홍시를 쪼아먹고 있었다. 사장나무를 돌아 집에 도착했다. 정애 애비가 기지개를 켰다. 누렁이가 침을 흘리며 사납게 짖었다. 올케가 부엌에서 나오며 고개를 숙였다. 건성으로 인사를 받았다. 작은방에서 조카들이 조르르 달려 나왔다. 이웃에서 넘어 온 감나무의 가지치기가 말끔했다. 소문을 들은 동네 노인들이 찾아왔다. 경순이 할머니가 토골댁의 손을 잡고 눈물부터 흘렸다.
" 무심한 사람아, 자주 좀 찾아오쟤 그랬는가. 늙으믄 자식들 생각 뿐인디. "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첫 발걸음이었다. 그것도 어머니 때문에. 홀어머니까지 돌아가시면 보고 싶어도 그림자조차 볼 수 없을 터인 데 너무나 무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으짠다고 그렇게 독한 마음을 묵었으까. 요새는 노인당도 안 나오길래 날씨가 추운 게 그런다냐 했등만. "
" 아니여. 맨날 영감님 죽은 다리 위에 멍하니 서 있등마. "
" 아무리 잘 모신다고 해도 부모 맘을 알간디. 자식이 효자란 소리 들으믄 부모도 반 효자 노릇을 하는 것이여. "
어머니는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다. 노인들이 가끔 한숨을 섞었다. 토골댁은 이야기를 듣다가 눈시울이 뜨거워 방을 나왔다.
누렁이가 또 사납게 짖었다. 토방만 쓸어진 마당을 깨끗하게 치웠다. 눈을 쓸어버리면 어머니가 훌훌 자리를 털고 일어날 것만 같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찬물을 한 바가지 마셨다. 빈속에서 짜르르 한기가 느껴졌다. 벌써 두 끼를 굶었지만 배가 고프지 않았다. 하지만 토골댁도 노인이었다. 연황빛 현기증이 몰려왔다. 수덕산 마루의 장군바위가 오래된 무성영화의 필름처럼 희미했다. 마당가에서 자치기를 하던 조카들이 손을 내밀며 달려왔다. 애써 정신을 가다듬고 그들의 손에 동전 하나씩을 쥐어 주었다.
" 영철아 학교 파하믄 놀지 말고 빨리 들어와서 할무니 수발도 들고 심부름도 잘 해야 쓴다. "
" 싫어. 맨날 죽은 할아부지 얘기만 하고 할무니한테 이상한 냄새가 나. "
토골댁은 순간적으로 영철이의 뺨을 철썩 때렸다. 급히 두어 걸음을 물러나 혀를 날름하고 가게 쪽으로 뛰어갔다. 그때 정애 애비가 대문을 들어섰다.
" 은행에 좀 다녀왔어요. "
" 고맙다. "
아들이 돈을 슬며시 내놓았다. 뒤쪽으로 돌아가 세어 보았다. 십 만원이었다. 갑자기 개가 컹컹 짖었다. 대식이 할머니가 지팡이로 개를 �고 있었다.
" 오메, 왔는가. 엄니는 으짠가 ? "
토골댁은 대답 대신에 개를 나무라는 대식이 할머니를 부축했다. 의식을 찾은 어머니가 눈물이 어린 눈으로 토골댁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와 토골댁, 두 노인의 눈빛이 마주쳤다. 어머니가 성그레 웃었다. 토골댁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 오메, 이것이 뭔 일이여. 괜찮해야 할 것인디. 그란디 또 큰 일이 났단게. 영전댁이 목을 매고 죽었다네. 그 노인 같이 불쌍한 사람도 없는디. "
" 그것이 진짜여. 으째 자살을 했당가 ? "
" 뻔한거 아녀 ? "
춘정강이 휘도는 곳에 외따로 위치한 양철집에 개 한 마리를 친구 삼아 살아 온 영전댁이 목숨을 끊은 모양이었다. 살짝 얽은 얼굴에 허리가 구부정한 칠순의 노인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가느다란 삶의 실을 끊어 버렸을까. 20여 년 전에 남편을 앞세우고 자식들은 모두 타국으로 이민을 가버렸다. 셋 째 딸이 먼저 브라질로 떠나 자리를 잡더니 하나 둘 모두 수속을 밟았다. 동네 어른의 생일날 막걸리라도 한 잔 마시면 영전댁은 자식들이 돈도 많이 송금하고 초청장도 보내지만 고향에서 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바람만 드나들던 양철집에 노인이 키우던 누렁이가 꼬리를 흔들며 맞아주면 말 못하는 개에게 서러움이 넘치는 신세타령을 늘어놓고 끝내 눈물을 흘렸다. 다행이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되어 지급되는 몇 푼으로 근근히 살아오던 노인이었다. 아마 또 여기 저기에서 자신의 손으로 세상을 거두어 버린 얘기가 들려 올 것이다. 곱게 키운 자식들 민들레 씨앗처럼 품을 떠나면 부모는 낡아 구멍난 신발이 되어 버린다. 젊음은 흰 머리칼과 주름살에 빼앗기고 저승사자를 기다리다 지치면 그나마 남은 세상의 끈을 잘라버린다. 그러면 소문을 들은 노인들이 눈물로 가슴을 앓다가 그 자신도 이승을 마감한다. 영전댁도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 세상살이 무거운 짐을 벗어버렸을 것이다.
방안의 공기는 긴장으로 차갑게 얼어 있었다. 고래가 수면에 올라 숨을 쉬는 듯한 긴 한숨만 가끔씩 들렸다. 토골댁은 답답하여 방문을 열었다. 그녀의 등 뒤로 한숨들이 다투어 퉁겨 나갔다. 하늘의 구름들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누렁이가 잽싸게 대문으로 달려가 술을 마신 병환이를 맞았다.
" 누님, 너무나 괴로와서 마셔 부렀소. 나도 자식인디 엄니를 입원시키기 싫것소. 근디 형편이 웬만해야쟤. 빚을 내서라도 입원을 하믄 좋것지만 누가 빚을 줘야지라우. 트렉타 사니라고 농협에 융자있쟤, 작년 겨울에 오이 하우스 맨드느라 사채를 썼는디 솔직히 이자 갚기도 벅차요. 올해 농사는 홍수로 망쳐부렀고 농협에서 날마다 전화가 왔싸길래 논을 내놨지만 누가 사도 안해라우. 쌀까장 수입한단 게 농사 짓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논을 내놓은 상태요. 누님이 서운해 한 것을 알쟤만은 나도 어짤 수 없었소. 그래도 못 배워주고 가난만 물려 준 아버지한테는 불만이 없소. 가슴이 아픈 것은 눈가림으로 대충 자, 장례 지낸 것하고, 아부지 살아서 어, 엄니랑 병원에 못 가본 것이고......"
토골댁은 병환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동생의 손이 자신보다 거칠었다. 못이 박힌 손을 쓸어 주었다. 올케가 병환을 부축해 방에 눕혔다.
아버지가 오르던 그 길을 토골댁은 발목이 빠지도록 쌓인 눈길에 발자국을 찍으며 올랐다. 종이컵에 술을 가득 따르고 담배에 불을 붙여 묘지 앞에 놓았다. 손가락을 모아 봉분의 눈을 쓸었다. 잔디는 온전히 뿌리를 내리지 못해 묘를 완전히 덮지 못하고 황토흙이 그대로 듬성듬성 드러났다. 손톱 크기의 꽃망울을 맺은 동백나무가 추위에 떨고 있었다. 토골댁은 잎사귀의 눈을 털어냈다. 푸른 잎사귀가 따스하게 느껴졌다.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선명히 떠올랐다. 주책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바람이 불어와 울음을 삼켜 버렸다. 토골댁은 술을 한 잔 마시고 북어포를 찢어 우물거렸다. 입안에 침이 가득 고였다. 아버지와 술잔을 거듭 나누었다. 추운데 뭐하러 올라 왔냐며 어서 내려가라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람에 묻어왔다.
토골댁은 가게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들이 준 돈의 촉감이 마음을 든든하게 만들었다. 어머니를 단 하루라도 입원시키고자 마음먹었다. 114를 눌러 읍내에 있는 병원의 번호를 물었다. 한 푼이라도 병원비에 보태려 토골댁은 약지에 끼워진 금가락지를 침을 묻혀 뺐다.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일기예보가 흘러 나왔다. 전라남·북도, 많은 양의 눈이 예상됩니다. 17:00를 기하여 호남지방 일원에 폭설 주의보가 발령되었습니다. 가게를 나서던 토골댁은 남은 동전으로 서울의 집에 전화를 넣었다. 손녀 정애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할머니, 엄마는 점심 때 외할머니랑 배가 아파서 병원에 갔어요. 곧 동생이 태어난대요. 나 혼자 뿐이에요. 빨리 오세요. "
" 그래. 이따가 아부지 보낼게. "
" 근데요. 고양이가 할머니의 조끼를 못 입게 만들어 버렸어요. 어쩌면 좋아요. "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달음질치던 구름이 기어이 눈이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청난 눈발에 길이 흐릿했다. 갑자기 아랫배가 싸르르 아파왔다. 집까지의 길이 아득하게 보였다. 신물이 넘어 오며 통증이 속 깊은 곳에서 밀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날카로운 칼로 위장을 도려내는 아픔이었다. 도시로 떠나버린 빈집의 담장에 손을 짚으며 휘청이는 다리를 간신히 지탱했다. 허물어지기 시작하는 담벼락에서 흙덩이가 발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비척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외양간의 서까래가 무너지듯 토골댁은 쓰러지고 말았다. 얼굴에 닿은 눈이 눈물처럼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다리에 힘을 주고 어렵사리 일어섰지만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다시 넘어지고 말았다. 꼭 쥐고 있던 가락지가 눈 속으로 파묻혔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눈앞에서 가물거렸다. 토골댁은 가락지를 향해 손을 뻗다가 정신을 잃고 말았다. 왜소한 토골댁의 몸 위로 어머니 쌈지 속의 소다가루처럼 눈부시게 하얀 눈이 겹겹이 쌓여갔다. 광견병에 걸린 듯 사납게 짖는 개의 울음소리가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산산이 찢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