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가족 이야기

무등산, 중봉에 오르다

然山 2010. 7. 4. 22:44

 

(무등산 등산이 시작되는 증심사 일주문)

 

사람은 누구나 아득하고 막막한 시절이 있기 마련입니다.

나 또한 대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가지가 힘들던 시간에 무등산을 자주 찾아 오르곤 했었지요.

자취방에서 당시에 5번 시내버스를 타고 종점에 내리면 바로 무등산 증심사 입구였습니다.

증심사 - (약사암) - 중봉 - 장불재 - 규봉암 - 원효사 길로 내려오곤 하였습니다.

반나절이 소요되었지요. 물 한병을 마시며 무등산 한 바퀴를 돌고나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힘겨웠지요.

그 힘겨움은 미래에 대한 암담함 때문이었지, 산을 오르느라 땀을 흘린 탓은 아니었음입니다.

젊어서 힘겨워했던 시간들이 지금은 오히려 그립습니다.

 

얼마전,

광주에서 잠깐의 일을 보고, 시간이 남아 오랜만에 무등산 기슭을 찾아갔습니다.

너무나 달라진 모습. 기억은 그대로인 데 눈 앞의 풍경은 낯선 듯 익은 듯...

 

(증심사)

 

점심을 먹기에도 어중간하고... 어차피 정상(천왕봉: 해발1187미터)까지는 오르지도 않을테니 중봉(해발 560미터)까지만 다녀오리라 마음먹었다.

느긋한 마음.

두 어곳의 슈퍼마켓을 지나왔더니 이제 가게가 없다. 하는 수 없이 물을 받으려고 증심사로 들어갔다.

마침 이른 점심공양을 마친 보살님들이 커다란 떡을 주신다.

 

 

 

너덜겅(바위가 많이 흩어져있는 비탈)에서 잠시 쉬면서......

 

 

깊은 산 속 옹달샘 누가 와서 먹나요? 새벽에 산 속에 토끼가 눈 부비고 일어나 세수하러 왔다가 물만 먹고 갔을 물도 한 모금 마시고....

 

 

중봉(중머리재)에 오르니 여러 갈래 등상로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손을 벌리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오르고 싶지만, 집에 돌아올 시간을 감안하여 발걸음을 멈췄다.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던지 아이들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모자는 바람에 날리고... 멀리 광주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과 하산하며 언젠간 일찍 서둘러 무등산 정상까지 다녀오자고 얘기하며, 재밌는 얘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조선을 세운 (서기 1392년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전국을 유람하던 시기에 지금의 경상남도  남해군의 어떤 산에 올라 '장차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고자 한다'는 기도를 올렸을 때 산신령이 홀연히 나타나 흔쾌히 찬성을 하였단다.

다음엔 무진주(지금의 광주)의 어느 산에 올라 같은 기도를 올렸으나 산신이 대노(大怒)하며 불가(不可)를 외치며 크게  꾸짖었다.

훗날, 조선을 개국(開國)한 이성계가  경남 남해군의 그 산을 비단으로 휘감고 산의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이름하였고, 무진주의 산은 덩치만 커다랄 뿐, 순위에 들지도 못하여 등위(等位)가 없는 산이라며 무등산(無等山)이라 이름을 하였다 한다.

허나, 무등산은 그 어떤 산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명산(名山)이기에 무등산이라 이름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허나, 진정으로 살피자면 '무등'은 불교와 밀접한 명칭이다. 무등산의 정상이 천왕봉인 데 이 역시 불교적 색채가 강한 이름이다.

예를들면, 월출산의 정상도 천왕봉, 무등산도 천왕봉, 지리산도 천왕봉.... 천왕.....천왕봉을 가진 산은 본래 사찰(절,卍)이 많았던 산이고, 사찰이 많았다는 것은 그 만큼 명당이 많았다는 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