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주사와 와불
요즘 모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추노'라는 드라마가 장안의 화제다.
추노(追奴)는 '노비를 쫓다'라는 뜻으로, 도망친 노비를 추적하여 잡는 일을 직업으로 삼은 일종의 사설경찰 혹은 사설 정탐꾼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어제는 전남 화순군에 위치한 운주사를 배경으로 드라마가 전개되었다. 낯익은 촬영지를 보면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
대학시절 동아리 선배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운주사 얘기가 나왔다. 운주사의 한자(漢字) 표기를 놓고 나는 운주사(雲舟寺)가 맞다고 주장했고, 선배는 운주사(雲柱寺)가 맞다는 의견으로 맞섰다. 결국 틀린 사람이 막걸리를 사기로 했었다. 국어사전으로 확인한 결과 선배의 말이 맞아서 막걸리를 샀던, 지금은 재미난 기억이 떠올랐다.
뿐인가, 동아리에서 야유회를 갔는 데, 그 목적지가 운주사였다. 지금이야 길이 넓혀지고 포장도로로 말끔하게 단장이 되었지만 그때는 금남로 도청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화순읍에 도착하여 능주면까지, 다시 그곳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비포장 도로를 한참 달려 운주사 부근에서 하차하여 족히 2~ 3킬로를 걸어서 운주사에 도착했던 기억이 새로웠다. 운주사 일주문을 지나서 운주사의 안내판을 두고 한참을 웃었던 기억이 어제처럼 또렷하다. 안내판이 절반은 한글로, 다른 한쪽은 영어로 설명되어 있었는 데, 내가 영어 안내판에 시선을 꽂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다시 한글 안내판을 보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더니 옆의 친구가 깔깔 웃는거였다. 내가 마치 한글은 모르고 영어 안내판의 내용을 이해하겠다는 행동을 취한 것을 친구가 재미있게 받아들인 것이었다. 운주사를 대충 돌아보고 우리는, 인근의 강가에서 버너와 코펠로 밥을 짓고, 국을 끓이고 소주를 나눠마신 기억도 떠올랐다.
그후, 결혼하고 집사람과 함께 가보았던 운주사는 많이 변모한 모습이었다. 길은 포장되어 있었고, 운주사까지의 운치있던 오솔길은 사라졌고 넓은 주차장도 조성되어 있었다. 대웅전도 새로 짓고 있는 중이었고 이곳저곳이 공사가 한창이어서 오히려 쓸씁했었다.
제작년 (08년) 여름, 광주를 다녀오다가 다시 찾은 운주사.
일주문을 지나자 야트막한 산에 흩어져 있는 석탑들과 야산의 바위 아래에는 크고 작은 석불들이 가지런히 서 있다. 자세히 살펴보니 그 형체가 거칠다. 정교함이 떨어진 것은 서둘러 석불을 조성했거나, 솜씨가 미흡한 일반인들이 참여하여 만든 석불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쳤다. 석불의 대부분은 코가 마모되고 없다. 아니, 부처님의 코를 깎아 갈아 마시면 아들을 낳는다는 속설때문에 사람들이 떼어가버린 것이다.
원래, 운주사에는 천불천탑이 있었다고 전한다. 천 개의 부처와 천 개의 탑이 운주사에 산재(散在)해 있었다니 엄청난 도량(道場)이 아니었나 싶다.
전하는 전설에 의하면, 어지러운 세상살이가 이어지자 새로운 지도자를 갈망하는 백성들이 이곳 이곳 운주사에 하루만에 천 개의 석탑과 천 개의 석불을 만들어 세우면 백성을 구제해줄 영웅이 나타난다고 했단다.
첫 닭이 울자 시작한 석탑과 석불 깎기 시작하여 999개를 완성하고 마지막 하나를 깎고 있는 데, 누군가 닭이 울어버렸다고 소리를 쳤단다. 모든 사람들이 실망하여 넋이 빠져있을 때 누가 닭울음 소리를 들었냐고 확인하였는 데 그 누구도 닭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었단다. 다시 힘을 내서 석불을 깎는 데 진짜로 닭울음 소리가 또렷하게 울려왔더란다. 결국 영웅을 맞이하지 못한 백성들은 참으로 고난한 삶을 영위할 수 밖에 없었단다.
어느 사찰이나 일주문과 사천왕상, 그리고 대웅전과 범종과 불상과 혹은 당간지주와 약수터로 기본 구성을 갖추고 있고, 불교문화에 문외한인 까닭으로 별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하는 터라, 대웅전을 일별하고 고샅길로 들어섰다. 보통의 사찰은 탑의 모양이 사각의 형태인 데 이곳 운주사는 탑이 둥글다.
기초를 이루는 기단부를 빼고 3층으로 구성된 탑이다. 게다가 탑의 꼭대기는 '보주'라하여 점차 좁은 모양을 갖는데 3층에서 그냥 마무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찾아보기 힘든 모양의 탑이다.
특별한 의미가 있음이 아니라면, 곳곳에 위치한 석불들도 섬세함 조각이 아니라 뭉툭한 것이 시간에 쫒겼거나, 탑을 조성한 사람들이 전문적인 석공이 아니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석불이나 석탑을 살펴보면 조성한 시대적인 배경에 따라 조각의 특징이 나타난다.
예를들면, 고려시대 초기부터 중기까지는 조각들이 섬세하고 아름다우나, 후기에 이르면 조각이 매우 거칠고 간소해진다. 그것은 고려중기까지는 비교적 정치와 사회 등이 안정적이었지만, 후기에 이르러서는 무신정권이 되면서 정치,사회, 문화, 군사 등이 복잡하고 급변하며 불안해지는 데 조각도 사회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둥근형태의 탑이 여러 곳에 세워져 있는데 그 위치를 살펴보면 북두칠성의 모양이라 전한다. 즉 하늘의 별자리를 닮도록 자리를 잡았다는 것은 하늘과 별의 힘을 빌리고자 했음으로 여겨진다. 또한 별자리의 연구가 활발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지금은 많이 소실되었지만 우주사의 터를 연구하면 북두칠성 뿐만이 아니라 하늘의 별자리 모양으로 석탑들을 세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석탑들을 지나면 산비탈의 바위면이 나오는 데 그 바위에는 석불이 새겨져 있다. 오랜시간 동안 비바람에 마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조각이 선명하다. 망치와 정으로 바위를 쪼아 부처님을 새겼을 민초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숙여진다. 그 원초의 힘은 어디서 시작된 것인지 짐작하기 어렵다. 아니, 짐작되어진다.
산비탈을 내려와 대웅전 뒷편의 야산으로 오른다. 운주사를 대표하는 와불(臥佛)이 계신 곳이다. 우선 그 크기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든다. 말 그대로 누워있는 부처님이시다. 부처님을 조각하여 세우려 했음이 분명하다. 애초에 이곳에 바위가 자리하고 있어서 부처를 깎으려 했는지, 어디서 바위를 옮겨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처음부터 위치한 바위에 부처님을 새기고자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바위가 있었고 적당한 크기로 바위를 떼어냈을 것이다. 떼어내고 남은 바위들은 수 많은 사람들이 어디론가 옮겨버렸을 것이다.
그렇다면 커다란 바위에서 적당한 크기로 어떻게 절단했을까?
변변한 기계가 없는 시대에 오로지 정과 망치로 바위를 떼어내는 일은 불가사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선, 바위결을 따라 정과 망치로 구멍을 내고 그 구멍에 버드나무를 깎아 박고 물을 흠뻑 부어 놓는다. 흡인력이 좋은 버드나무가 물을 머금고 있다가 겨울에 얼어 붙는다. 물은 얼면서 부피가 커진다. 작은 구멍에 작은 물이지만 물의 부피가 늘어나면서 바위는 결을 따라 쪼개지는 것이다.
바위를 다듬고 정으로 쪼고 조각하여 만든 석불을 어떻게 세울 계획이었을까? 크기와 무게가 엄청나서 많은 사람이 달라붙어 세우려해도 잡을 곳이 부족할 수 없는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지만 운주사의 와불은 처음부터 와불이 아니었을 것이다.
처음부터 바위를 세워둔 상태에서 부처님을 조각했을 것이다. 커다란 바위의 결을 살펴 필요없는 부분을 떼어내면 세로의 큰바위가 넘어지지 않고 남겨질 것이다. 사다리를 놓고도 머리부분을 조각할 수 없으면 바위를 중심으로 좌우에 흙으로 계단을 쌓아 조각하고, 조각이 끝나면 계단으로 사용한 흙을 허물어 적당한 곳에 버리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운주사의 와불도 처음엔 세워진 채 조각되었거나, 조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이 중단되었고, 많은 세월동안 비바람에 계단으로 쌓아진 흙은 허물어져 빗물과 함께 흘러 산이 되었고, 바위를 받쳐주던 흙계단이 없어지면서 석불이 넘어져 와불이 되어 지금까지 전해져 온 것으로 추측한다.
지금이야 도로가 넓혀지고 포장된 운주사.
운주사의 비밀을, 운주사의 전설을, 운주사의 천불천탑을 누구도 알지 못한다.
말없는 천불천탑만이 그 날의 진실을, 비밀을 품고 있을 뿐이다.